결정적인 순간은 갑자기 온다
아는 작가님 집 근처의 찜질방에 묵었다. 얼마 전 친해진 사진 작가님들과 출사를 위해 하루 빨리 서울에 왔기 때문에 저렴한 숙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밤 12시가 되어서 샤워를 마치고 피로한 몸을 이끌고 찜질방에 매트를 깔고 눈을 감았다. 내일은 인사동 갤러리에 있는 ‘미틈달의 필름 스케치’ 전시를 철거하는 날이기 때문에 빨리 자야 한다. 평소 10시에 눈을 감다가 12시가 넘어 잠을 자려니 리듬이 깨졌다.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일이 온다는 진리를 미뤄둘 수 없음에 가만히 누워있는다.
“위이이이이이잉!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즉시 건물 밖으로 대피하세요.”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건물 전체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놀랐으면서도, 밍기적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 무리에 속해 있었는데, 탈의실에 먼저 들러 사람들의 동향을 살피고 어기적거리며 카운터로 나가본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카운터 직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카운터 직원은 오작동일 수도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찜질방이 지하 2층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연기가 피어오른다거나, 외부 상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대기해야 했다. 이 상황을 참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겉옷을 챙겨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10분이 지나도록 사이렌은 멈추질 않았다.
탈의실로 되돌아가 휴대폰을 잠깐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였다. 다시 락커에 휴대폰을 넣고 카운터로 나갔다.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난 채로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직원에게 따졌다.
“불이 났으면 대피를 하라고 하던가, 오작동이면 오작동이라고 방송을 해야할거 아니야!!!”
내 나이 또래의 젊은 남자 직원은 차분하게 사람들의 분노를 듣고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관리사무실 직원의 전달이 있기 전까지 중간 관리자으로서 자신은 이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거였다. CCTV로 건물 내 화재 발생 구간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며 가만히 기다려달라는 얘기만 반복했다. 나는 신발장과 출입문을 번갈아보면서 고민했다. 나가서 직접 상황을 확인하고 와야 하나, 아니면 망설이는 사람들 틈에서 그대로 기다려야 하나.
작년 심폐소생술을 했던 때가 떠올랐다. 눈 앞에서 사람이 두 번이나 쓰러진 상황을 겪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무기력해 심폐소생술 교육까지 받았는데, 지금은 내 목숨을 걸고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런거지?
내가 나서서 행동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에 대해 눈치를 보고 있던 거였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 없었다. 골든 타임은 진작에 지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눈치를 보고 있다.
30분이 넘어서야 경비 재킷을 입은 단신의 할아버지 한 명이 와서 화재경보기 오작동이라는 안내했다.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은 아저씨들의 화풀이는 계속 되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의 신고에 따라 현장에 출동한 남자 경찰 3명이 시설 내부를 살펴보러 왔다. 그들은 차분히 신발을 벗고 남자사우나로 향했다. 이상하다. 화재가 났다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차분하게 행동할 수 있나?
카운터 직원에게 감정을 표출하던 남녀 어르신들이 다시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끝까지 팔짱을 끼고 아무 말 없이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내게 직원이 말을 걸었다.
“뭐 때문에 그러신가요?”
“그냥 상황 좀 보려고요.”
직원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기 때문에 다 알고 있다. 오작동이어서 망정이지 만약 정말로 화재가 발생한거였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왜 눈치를 보고 있던 거였을까.
요즘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북페어 행사장에서 알게 된 작가님을 통해 사진 전시를 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캐나다행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돈을 아끼기는 커녕 소비를 해대고 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무의식적으로 한국에 머무르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안정적인 환경’에 놓여있던 거였다.
사실 이번 화재 경보기 오작동 사태에서 내가 멀뚱멀뚱 주변의 눈치를 보고 행동하지 못했던 것도 한국에서 너무 안정적으로 오래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더 확고히 한국을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해서 온화한 내 삶의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한다. 앞으로 더욱 크고 넓은 사람들과 기회를 마주하기 위해서.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드시 안정적인 환경을 떠나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정한 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건 분명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과 돈을 쓰면 안된다.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여기서 헤어지기로 한다. 단톡방을 나가기로 했다. 나를 소개해준 작가님과 따로 대화를 해서 소식을 전해주어야겠다. 아침에 만나니 그때 얘기하자. 그렇게 정하니 방향성이 확고해졌다.
추가) 찜질방 사건 후 다음날, 갤러리 전시를 철거하고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단톡방을 나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무리 중에서 악한 인간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수월했을텐데.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 선포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인연을 끊자는 것이기도 하니까. 나는 왜 이렇게도 약한 걸까.
내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내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바보들은 2026년 해돋이를 보러 가자며 화기애애하게 다음 일정을 잡고 있다. 후...
* 본 도서는 작가의 주관성을 보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댓글을 막았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