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마이너스 통장 개설
캐나다 워홀을 가려면 최소 정착금 500만원 정도는 모아두는 게 좋다는 게 정론이다. 1년 전부터 계획하고 착실히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출국 1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모은 돈이 고작 200만원이라니.(12월 카드값 99만원을 상환하면 사실상 101만원만 남는다) 이 돈이면 숙소 보증금 + 한 달 월세 내고 끝장날 판이다. 돌아올 비행기 티켓도 못 산다.
그와중에 여권 재발급에 따른 신규 eTA를 발급 받느라 7 CAD를 지불해야 했다. 머리 아프다. 하...
임시숙소를 마련하고 잡을 구한 뒤, 숙소를 정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내 사정에서는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게 10일짜리 임시숙소와 30일짜리 홈스테이 렌트비가 비슷하다는 게 말이나 되나?
내겐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제한적인 환경은 빠른 선택과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에어비앤비로 잡아둔 임시숙소를 전액 환불 가능이라는 문구를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취소하고(호스트가 미리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재빨리 홈스테이와 쉐어하우스를 공략하기로 한다.
어디서 일을 할 것인지 미리 확정된 상태라면 큰 부담을 줄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전세계 경제가 어렵듯 캐나다 역시 일자리를 얻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 역시 정신적인 압박으로 다가온다. 한 달 넘게 80곳이 넘는 매장에 레쥬메(경력증명서)를 돌렸지만, 일을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귀국을 결심하게 됐다는 커뮤니티 후기 글이 하나 둘 올라오면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왜 나는 1년 동안 돈을 모으지 못했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독립출판(+북페어 참가)
2. 마라톤 대회 참가
3. 기타 전시 참가 등
500부 인쇄한 도서를 판매하기 위해 북페어로 나가야 했으며, 러닝에 재미가 붙어 매달 마라톤 대회를 하나씩 나가고자 하는 마음에 돈을 쓰게 되었으며, 포토그래퍼 활동을 하게 되면서 사진전 참가비 등의 명목으로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마라톤은 북페어 일정과 겹쳐 포기해서 참가비를 날려야만 했던 대회가 꽤 있었다.
개인적으로 2025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나의 다양한 가능성의 씨앗을 열심히 뿌리던 시기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안할 수가 없는 활동이었다. 왜냐하면 전부 '해보고 싶은 것들'이었고, 살면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른 넘어 인간이 가진 생명력의 원천은 '호기심'이라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믿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을 벌렸다.
현실로 돌아와서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제아무리 고액 알바를 하더라도 고작 2주 만에 400만원이 넘는 돈을 채울 자신이 없다. 하다못해 250만원이라도 채우고 싶은데 경기가 어려운 탓인지 일일 알바로 써주는 곳도 없다.
죽도록 싫지만 내 시간을 헐값에 팔겠다고 세상에 아우성쳐댔지만, 충격적일만큼 관심을 가져주는 곳은 없었다. 말 그대로 비상이다.
예전에 아는 동생이 알바를 구하지 못해 '생활비 대출'이라는 걸 받았다는 게 떠올랐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비상금 대출'을 검색해본다.
토스 뱅크, 카카오 뱅크, 한국장학재단 등에서 받을 수 있는 대출이 꽤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국장학재단의 생활비 대출은 '직전 학기 12학점 이상 수료'라는 조건이 있어 최대 150만원까지 1%대 금리로 대출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음 달 졸업 예정자이기 때문에 '대학생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누리자!'는 못된 심보로 콜센터에 전화했으나, 다음 학기 신입생 또는 재학생 신분을 충족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포기해야만 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런저런 것들을 비교해보다가 KB국민은행의 비상금 대출을 실행하게 됐다. 300만원. 한때 주거래은행이었던 덕분인지 우대금리 0.4%를 감면 받는 혜택까지 있었다. 계약 기간은 1년에, 심사 결과에 따라 연장 가능하다고 한다.
정확한 내 신용점수는 모르지만 900점을 거뜬히 넘는다는걸 이미 알고 있다. 한번도 공과금 등을 연체한 적이 없고, 작년 이맘때 회사 다니면서 중기청 대출로 전세집을 살았던 적이 있었다. 전세 계약을 중도 해지하긴 했지만 딴짓하지 않고 즉시 은행에 대출금 전액을 반환했다. 그 덕분인지 신용점수가 재빠르게 회복되었다.
잔고를 열어봤더니 출금 가능액에 소지금 100만원 + 마이너스 통장 300만원의 한도만큼 불어나 있었다. 쓰는 만큼 금액이 -되는 방식이고, 이에 따라 이자가 발생한단다. 며칠 후 상환될 12월 카드값 99만원을 미리 상환했다.
중고거래로 캐나다 달러를 구매했다. 판매자가 알려준 위치로 가니 모녀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돈봉투 안에서 지폐를 하나씩 꺼내 총 1,000 CAD가 맞는지 확인까지 시켜줬다. 대개 '네이버 환율 시세'를 기준으로 캐나다 달러를 거래하는데, 운 좋게도 이날 최저가였던 덕분에 아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라고 해봐야 10~20원 차이지만)
해외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액권 여러 장보다 소액권이 합쳐져 있는 게 현지에서 사용하기 편리하다. 모녀가 알아채지 못할 기민함으로, 천장에서 뿌려대는 가로등 불빛을 활용해 순식간에 위조 지폐가 아닌지도 확인했다.
나는 무턱대고 대출을 한 것인가? 그건 절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캐나다에 들어가기만 하면 투잡을 뛰어서라도 1년 안에 상환할 작정이다. 일자리도 없다는데 그게 되겠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덜 먹고 덜 쓰면 되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되는 '때'가 있다. 이번에 떠나지 않으면 나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두렵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일자리 게시판에 올라오는 구인 공고는 대개 비슷한 업종이었다. 스시, 한인 식당 등. 여기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싶다. 나는 친목을 다지려고 떠나는 게 아니다. 첫째는 영어 숙달이고, 둘째는 고립이다. 이 시간 동안 전세계인들과 공감할 수 있도록 내 눈높이를 끌어올리고,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헬스, 글쓰기, 프로그래밍/전기/디자인 공부 등의 활동을 하고 싶다.
나는 영어를 그리 잘 하지는 못한다. 생존 영어가 가능한 정도다. 그러므로 큰 불편이 가볍게 예상된다. 그리고 불편한 이유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이미 세계여행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기도 하다. 직접 부딪혀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일도 있다.
그래서 대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