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결론이 정해진 자리에서

사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던 시간

by 김현규 Sean



1.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마주한 자리


한국 일정 중 연락을 받았다.

확인할 내용이 있으니 본사로 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조사가 시작됐을 때,

나는 내가 어떤 부분을 설명해야 하는 자리인지조차

완전히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다.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나는 주어진 질문에 차분히 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내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는 자리라기보다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절차가 먼저 진행되고 있구나.’


그 판단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단정할 수 없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2. 가장 힘들었던 건,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시간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의심 그 자체라기보다, 혼자 정리해야 했던 감정들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역할과 위치에서

조심스럽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버텨야 했다.


누군가는 신중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

모두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안에서,

나는 혼자 마음을 정리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3. 가장 크게 흔들린 건, 일보다 관계였다


그 순간 가장 크게 흔들렸던 건

지금의 상황보다, 지난 시간들이었다.


나는 이 조직을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함께 책임을 나누는 공동체처럼 생각해 왔다.


위기가 있을 때마다

조직이 먼저 떠오르는 선택을 해왔고,

그게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더 마음이 복잡했다.


지금의 상황이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동안 당연하게 믿어왔던 관계의 모습이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4. 말보다 침묵이 많았던 시간


그 시기에는,

서로가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누군가는 조심스러웠고,

누군가는 절차를 따르고 있었고,

누군가는 일상 업무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누군가에게 감정을 털어놓기보다는

스스로 정리하는 쪽을 택했다.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하는 게

조직에도, 사람들에게도 부담을 덜 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5. 설명보다 먼저 마음이 흔들리던 순간들


설명을 충분히 듣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다 보니,

마음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겹쳐 쌓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어디까지 정리되어 있는지,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 건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판단이 내려질지.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 순간의 나는 더 이상

모든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였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조직의 결정보다도

내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게 됐다.


6. 조직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된 순간


그 시간을 지나며,

나는 조직보다 먼저

나 자신의 기준을 돌아보게 됐다.


그동안 나는 늘

조직의 안정과 팀의 보호를 우선에 두고 움직여 왔고,

그 선택이 옳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조직을 위한다’는 말 안에

나 자신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던 건 아닐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그건 조직을 원망해서가 아니라,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만 버틸 수는 없겠다는

현실적인 자각에 가까웠다.


7. 그럼에도,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었던 이유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곧바로 모든 걸 내려놓고 나오지는 않았다.


남아 있는 프로젝트들이 있었고,

조직이 이어가야 할 흐름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겠다는 결정을 한 이후에도

정해진 KPI와 업무를 끝까지 마무리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지키고 싶었던 기준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한 방식이라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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