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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Apr 17. 2020

96. 기분 좋은 거절은 없다.

오랜만에 온 연락.

2~3년 전, 과학 보고서와 영재교육원 입학을 위해 수업을 받았던 학생 어머님의 전화였다.


이제 고 2가 되는 본인 아들의 팀 수업을 해줄 수 있냐며 시간은 선생님께 맞추겠으니 무조건 해달라는 막무가내의 부탁, 아니 강요를 했다. 뭐 사실 이 수업을 안 해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데, 더군다나 요즘 같은 불경기에 감사할 일 아닌가?


그런데 이 어머니, 수업료를 너무너무 후려치시는 거다. 두 명이 하는 팀 수업인데 둘이 합쳐서 내는 교육비를 보통 한 명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낮은 비용으로 해달라는 거다. 쉽게 얘기하자면 원래 혼자 듣는 비용이 100원인데 둘이 합쳐 80원을 내겠다는 말. 기존에 하고 있는 다른 수업이 워낙 많아서 경제적으로 힘들고 본인이 여기저기 소개도 많이 했는데 그 정도는 배려는 해줄 수 있지 않느냐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셨다.


맞다. 소개를 좀 해주긴 했지. 어떤 소개들이었냐면


1.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수업을 수시로 취소하는 학부모 - 여행 가는 거면서 남편이 코로나 때문에 과외하지 말라고 했다는 핑계를 댐.


2. 개인 수업인데 이력서를 제출해 달라며 내 이력을 심사하더니 아이가 수업하기 힘들어한다며 일방적으로 수업을 취소하는 학부모 - 내 스펙이 별로였던 거지 뭐.


3. 장기 해외 어학연수 가면서 미리 얘기하지 않고 출국 하루 직전 통보하는 학부모 - 아이가 말실수해서 한 달 전에 미리 알았다만, 언제 얘기하나 내가 기다려봤다.


4. 영재고 원서 접수 직전 여기저기 학원에서 돈 팡팡 쓰다가 손에 쥔 결과물도 없이 무조건 자소서 써달라는 학부모 - 그리고 꼭 자소서 비용은 깎더라. 이미 돈 많이 썼다고. 내가 그런데 돈 쓰라고 시켰니?


5. 돈 줬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실험 다 해주는 거 아니냐는 학부모 - 아니 실험하는 척 학생 사진은 찍어야 할 거 아냐?


이런 분들을 소개해주신 덕분에 아주 아주 개고생을 하거나 도저히 못할 수업은 거절했더니 욕을 하도 많이 먹어 나는 무병장수할 정도가 되었지.


오랜 강사생활 속에서 그나마 배운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만만한 인간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거다. 물론 모든 사회생활이 그렇겠지만! 내가 말랑말랑해 보이면 수업도 당일 취소하고(30분 전에 취소하는 분도 있다. 자기 아이가 잠이 깊이 들었다면서) 시간 여유를 주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한다. (1주일 남기고 실험보고서 써달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이런 부탁을 들어주는 게 나쁜 일이 아니라고 착각했었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겠거니, 짧은 시간 대단한 성과를 보여주는 최고 선생으로 보겠거니. 근데 점점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들이 나를 능력자가 아니라 호구로 본다는 걸을 알게 되었고 결국에는 어떤 말이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의심병 환자가 되었다.


아까 강사 커뮤니티에서 코로나로 인해 수업료를 깎아달라는 학부모가 있는데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글을 읽고 저 선생님도 나처럼 정에 이끌려 잘못된 선택을 하실까 걱정이 되었다. 저런 착한 심성을 학부모가 이용하려는 건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댓글을 읽어보니 선배 강사님들의 현명한 조언이 많았다. 그중 대다수의 의견은 수업료는 깎지 말고 수업 횟수를 줄이는 방법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근데 이 해결책은 학부모님께서 동의하시지 않을 거다. 돈은 적게 주고 싶지만 수업의 질이 떨어지길 원하진 않을 테니.


물론 학부모가 억울해 할 수도 있다. 아니, 월세를 깎아주는 건물주도 있는데 그간의 정이 있지 좀 양보해달라고 할 수도 있다. 근데 강사가 수업을 안 하면서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수업은 제대로 다 듣고 돈은 깎아달라니 본인들한테 코로나로 회사가 힘드니 일은 똑같이 하지만 월급은 줄이자고 하면 거품 물고 달려들 거면서 모순적인 거 아닌가?


여하튼, 나는 오늘 기분 나쁜 거절을 했다. 그 학부모는 뒤에서 나를 욕할 것이고 자기 조건을 맞춰주는 또 다른 선생님을 찾아 헤매겠지. 어차피 그 가격을 맞춰줄 대치동 선생이 없을 뿐이다. 나도 이제 진짜 대치동 선생이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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