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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May 27. 2020

105. 여기 학원은 월급 안 밀리나요?

이제 막 들어온 선생님이 화장실에서 양치질하고 있는 내게 질문한다.


여기는 제 때 월급 주나요? 밀린 적 없어요?


입 안 가득 치약 거품을 물고 있는 내게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니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화장실에 단 둘 뿐이고 내 얼굴을 보니 솔직하게 얘기해 줄 사람으로 보였으니 이런 질문을 한 모양이다. 나는 입 안에 있던 거품을 헹궈내고 대답했다.


한 번도 밀린 적 없어요. 매달 말일이 월급날인데 휴일이면 그다음 날 주신 적은 있지만요.


아마 이 선생님, 그전에 월급이 밀린 적이 있었나 보다. 당연히 받아야 할 월급을 출근 첫날부터 걱정하는 걸 보니 예전 학원생활이 순탄치 못했던 듯.


학원가에서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명언 하나가 있다.


첫 달 월급이 밀리면 그만둬라.


첫 달부터 월급이 밀린다면 퇴사 전까지 제대로 월급을 받을 확률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원장이라면 첫 달 월급은 강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라도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제 날짜에 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첫 달부터 밀린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돈이 제대로 안 돌고 있는 학원일 테니 얼른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월급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힌트가 있는데 학원 출석부만 봐도 대충 눈치를 챌 수 있다. 학원 출석부에 담임이 자주 바뀐 흔적이 있다거나 출석을 부르는데 그만둔 학생이 많다면, 혹은 갑자기 다른 반과 합반이 된다면 뭔가 이 학원은 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급이 안 들어오니 선생들은 지쳐 후임 없이 학원을 그만두고 선생이 자주 교체되니 불안한 마음에 학생들은 학원을 그만둬버리니 담임도 자주 교체, 학생도 출석부에는 이름이 있지만 이미 그만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상담 전화를 해봐도 전화를 안 받거나 잦은 선생 교체를 불평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면 그건 100퍼센트, 첫 달 월급도 못 받게 된다는 신호다. 나도 어떤 학원에 입사해 담임 교체 건으로 인사차 전화했을 때 학부모의 첫마디가


그 학원은 선생이 일주일을 못 버티나 봐요?


완전 똥 밞은 느낌이었다. 돈 많이 준다고 해서 왔더니 이건 완전 부도 수표였다. 역시 학원이 망하며 마지막 월급을 받기까지는 6개월이 넘게 걸렸다. 이 학원이 문을 닫을 때 학원 기물을 훔쳐가는 다른 선생님들을 보며 돈을 못 받으니 아주 제대로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종이 30장을 한꺼번에 찍을 수 있는 스테이플러가 그렇게 탐이 나는지. 아님 돈 대신 가져가려는 건지. 나에게도 가져갈 만한 것을 챙기라는데 솔직히 망해서 월급도 못 주는 재수 없는 학원 물건 챙겨 오면 내 운이 날아갈까 먼지 한 톨도 가져오고 싶지 않았다.


운이 나빴던 건지 내가 다녔던 학원 중 절반에 가깝게 폐업을 했는데 그 학원들 대부분 제 날짜에 월급 지급을 하지 못했다. 큰  규모의 학원이든 작은 규모든  원장의 불성실함이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쪼들리다가 결국 월급이 밀리고 선생들은 후임 없이 그만두고 급하게 선생을 구해놔도 아이들은 이미 많이 그만둔 상태니 학원이 폭삭 망할 수밖에.


나도 나이가 들다 보니 남에 밑에서는 일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채용 시 나이 제한이 있는 학원에서는 이미 서류에서 입구 컷이 될 것 뻔하니 언젠가 울며 겨자 먹기로 학원을 차려야겠지. 근데 내 학원에 입사하는 선생이 월급을 못 받을까 걱정하지 않도록 사업을 잘 꾸려갈 자신이 아직은 부족하다. 그래서 학원을 차릴까 백만 번 고민만 하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하는 중.


원장도, 선생도 서로를 당연하게 믿을 수 있는 그런 학원가는 될 수 없는지 이 늙은 강사는 오늘도 고민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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