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chovy Jul 05. 2020

112. 나올 것들만 찝어서 가르쳐 주세요.

대학 병원에서 진료 수속을 밟고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병도 안 걸렸는데... 왜 비싼 검사는 받으라케서 생돈을 가지가나? 내사마 몬 참는다. 의사 새끼가 사기꾼이다. 아니 병원 것들이 다 사기꾼이다.


병원 수납 창구에서 나는 이 시끄러운 소리는 한 할머님의 분노에 가득 찬 항의였다. 증상이 심상치 않아 정밀 검사를 받으셨는데 별 문제가 없다니 너무 억울하시단다. 왜 아프지도 않은 멀쩡한 사람을 검사했냐며 돈독 오른 병원 것들이라신다. ㅎ 음~ 그래 조금만 이상해도 검사받으라면서 비싸긴 하지. 혹시나 몰라서 한 검사의 결과가 ‘아무 이상 없다.’ 라니 억울하신 거다.


나는 이 시끄러운 할머니를 보며 문득 학원에서, 혹은 개인 수업에서 시험 직전 몇 번만 딱딱 찝어서 가르쳐달라던 학부모가 생각났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냐면 자기 아이가 뭘 모르는지 어디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검사도 안 받고 증상을 딱 알아맞혀 처방해달라는 거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할머니와 비슷한 억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한 달 전이면 그나마 양반이지만 2주나 1주 전쯤 총 6시간만 액기스로 딱 수업해주고 모르는 것 있으면 질문 좀 받아달라는데 ㅎ. 모르는 게 뭔지 알려면 시험 범위 내에 이론 설명은 한 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만 해도 4시간이 드니 모르는 부분 보충 설명하고 모르는 문제까지 풀어줄 여유 시간이 없다. 어려워하는 부분만 딱 찝어서 설명하면 1시간에도 가능하지 않냐는 얘기에 어이가 털린다. 내가 무능력한 사람인 건지 시험 대비하는데 6시간으로는 마무리가 되질 않는다. 내 경험상 학생들은 자신이 뭘 알고 있는지나 이해가 안 된 부분이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지난 중간고사 때도 지구과학에서 대기와 해수 파트는 잘 안다더니 혼합층이 제일 두꺼운 위도를 저위도라고 대답하더라. ( 모르시는 분을 위해 부연 설명하자면 해수는 혼합층, 수온약층, 심해층의 층상 구조를 가지는데 이 중 가장 위에 있는 혼합층은 바람이 셀수록 두꺼워진다. 그리고 바람이 센 건 중위도라고!)


자기 아이의 수준도 모르면서 족집게 선생님만 바라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할지. 내신 때마다 개설되는 단기 특강들을 보며 저것만 들어도 우리 애가 1등급 맞겠거니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학원이 원망스럽다. 물론 평상시 자기 주도 학습을 제대로 하고 있었던 학생이라면 이런 내신 특강은 마무리 차원에서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런 아이들이 족집게를 찾겠는가? 꼭 공부는 설렁설렁하던 아이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져 공부를 시작하니 문제라는 거다.


중학생까지야 어느 정도 족집게 선생의 실력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근데 고등학생은 족집게 선생 덕분에 시험을 잘 본다는 것은 많이, 아주 많이 드문 일일 것이다. 사교육에 몸 담고 있으면서 매년 노하우가 쌓이고 보는 눈이 더 확실해지는 나도 족집게처럼 찝어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지난 중간고사에 거의 99퍼센트 시험 문제를 적중했지만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4명의 녀석 중 단 한 녀석도 만점 없이 나란히 90점대의 점수를 받았다. 또한 이 친구들은 지난 12월부터 나와 수업을 했으니 단기간에 완성된 점수는 아니라는 거다.


어머님들, 거저 얻는 것은 없겠죠? 평소에 공부 열심히 시키시면 족집게 선생 필요 없어요. 인강만 듣고도 잘하는 애들도 있는 건, 타고난 머리와 노력의 결정체랍니다. 족집게는 잔털 뽑을 때나 찾아주시길!


매거진의 이전글 111. 코로나 19로 손해 보는 고3을 구제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