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chovy Aug 07. 2020

126. 종이컵을 달고 온 아이

최근 8월 말 받게 되는 자궁근종 수술을 일정으로 인해 수업 스케줄이 더 빡빡해졌다. 수술 후 잠시 쉬게 되는 만큼, 미리 수업을 더 해주길 바라시는 학부모도 많은 데다 아이들 방학까지 겹쳐 정말 집에 오면 저절로 딥슬립을 하게 된다. (덕분에 불면증 탈출! 역시 진짜 피곤하면 잠이 오는 거였어.)


학생들에게도 수술에 대한 얘기와 일정을 조율하다 보니 남자아이들이 돈가스 사준다는 엄마 말에 속아서 했다는 ‘포경 수술’ 얘기도 나왔다. 나는 레이저로 했다, 난 마취가 안 들어서 죽을 뻔했다, 난 아직 안 했는데 꼭 해야 하냐. 포경 수술 얘기로 한바탕 웃고 나니 내 자궁근종 수술의 우울함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듯했다. 그리고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 하나가 생각났다.


지금은 패션모델을 하고 있는 정ㅂㅈ라는 남학생인데, 어느 날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학원에 온 것이다. 자신만의 패션 철학이 있다고 해도 이제 중학교에 올라가는 14살 남자아이가 치마라니! 뭔 일인가 싶었다. 의아한 내 표정과는 달리 다른 남자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으며


종이컵 달고 왔어?


라고 얘기를 했다.


뭔 종이컵을 달고 와. 아무리 봐도 종이컵이 안 보이는데.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답답했던지 치마를 입고 온 이 녀석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고래 잡고 왔어요. 수술한 부위 아플까 봐 종이컵 씌우고 바지 입으려니 힘들어서 엄마 치마 입었어요.


와! 그 말로만 듣던 고래 잡는 수술! ㅎ

그걸 했는데도 아들을 학원에 보내신 어머님! 대단하십니다.


애들이 놀리기는 했지만 의외로 이 녀석은 당당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치마가 편한 것 같다며 남자들도 치마를 입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입는다 이 녀석아.^^)


그 후로도 많은 남학생들이 종이컵을 달고 어기적어기적 학원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겨울 방학 시기인지라 덧나지 않고 잘 아물 수 있는 계절이라 포경 수술이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치마를 입고 온 녀석은 한 놈뿐이었지만 다들 똥 싼 바지처럼 가랑이가 저 밑에 있는 바지를 입고 다들 용감하게 수업을 들으러 왔다.


새로 포경 수술한 학생이 내 수업에 들어오면 축하, 혹은 격려 차원에서 아이스크림 파티를 하기도 했다. 특별히 수술한 학생에게는 비싼 콘 제품을 먹게 해 주었던 덕분인지 다들 재미있게 그 겨울 방학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그 시절, 고래 잡는 수술에 깔깔거리던 그 아이들은 잘 지낼는지. 모두가 그리워진다.


다들 잘 지내니? 선생님은 너희들과의 추억이 즐거웠는데. 모두 건강하렴.

매거진의 이전글 125. 내 몸보다 애들이 더 걱정되는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