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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Dec 02. 2020

134. 이거 프린트하고 택배로 보내주세요.

2년 정도 개인 수업을 하다가 최근 수업을 그만둔 학생 하나가 있다. 지난 자궁적출 수술과 방광 요관 재문합술까지 하며 수업 재개가 늦어지다 보니 어머님께 해고 통보를 받아 3개월 전부터 얼굴도 보지 못한 학생.


수업을 중단했음에도 빈번하게 문자로 질문을 하는 학생이 다소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가르친 정이 있는 만큼 즐거운 마음으로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도를 지나친 부탁을 하면서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업을 그만뒀음에도 기말고사 대비를 위해 알뜰히 나를 활용하며 이미 10여 개가 넘는 문자에 답을 한 상황이었다. 한 시간 동안 10개가 넘었다고! 아니 그럼 나를 왜 자른 거야! 근데 이 녀석, 이메일로 출력할 문서 보낼 테니 출력, 제본 후 택배로 보내달란다! 엥? 내가 문자를 잘못 읽은 줄 알았다. 뭘 보내?

엄마가 회사 출근을 안 해 시험대비 프린트물 출력을 못하니 내가 대신해서 택배로 보내달라는 거였다.


그래 어디 한 번 보낸 문서가 뭔지나 보자. 하며 메일을 열었는데 출력할 문서가 20개가 넘었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이 녀석이 나를 뭘로 보면 이런 일을 시킬 수 있을까? 물론 이 아이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불가피한 이유로 현재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상황이고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병원에 입원해 계신 상황이니 이해가 되다가도 프린트를 해서 택배로 보내라니! 현재 수업하는 학생이라면 모를까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까짓 출력이 별 거냐 싶겠지만, 내가 집에서 출력하고 제본하고 택배를 보내는 수고로움을 해야 하는 일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선생이 그런 일도 못하겠냐 싶으면 본인들이 해주세요. 저한테 강요하지 마시고!


해고 통보를 받고 수업도 안 하는 학생이 하루에 몇십 개의 문자로 기말고사 질문을 해대도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결코 이렇게 철판을 깔고 부탁, 아니 요구를 할 수 없을 텐데 이건 진짜 선을 넘은 일이었다.


결국 온라인으로 문서를 보내면 출력, 제본 후 택배로 배송해주는 업체를 알려주고 이 일을 마무리했다. 참 씁쓸하고 개운치 않은 해결 방법이긴 했지만. 예전부터 이 아이의 엄마는 이해 안 되고 나를 불쾌한 기분이 들게 한 일이 많았는데, 아이와 부모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예뻐한 내 실수였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 아닐까 싶다. 선을 넘는 순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일지도! 오늘도 나는 하나 더 배우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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