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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Jan 03. 2021

135. 공부를 못해도 네가 예쁜 이유

이번 기말 시험을 준비하며 갑작스럽게도 가장 낮은 레벨의 반을 맡게 되었다. 사실 나는 늘 잘하는 아이들, 자사고나 영재고 아이들 같은 최상위 반을 가르치던 우물 안 개구리였기에 이번 시험대비는 리스크를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큰 모험이었다.


17살.

고 1 아이들이지만 유성생식이 뭔지도 모르는 완전 바닥 중 바닥, 최하위 아이들. 첫날 확인해본 이 아이들의 실력은 예상을 뛰어남을 정도로 바닥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곡할 노릇일까.

이 아이들이 SKY를 노리는 상위권 학생들이 아님은 분명했지만, 내가 칠판에 한 글자라도 필기를 할 때면 약속이나 한 듯 열심히 끄적이는 모습이 내 눈에는 너무 예쁘기만 했다. 오래간만에 뿌듯함이라는 감정이 되살아났다. 진짜 신기한 경험이었다.


솔직히 말해 대치동 아이들 중 대다수의 아이들은 여타 지역의 아이들에 비해 선행 수준도 빠르지만 이해 정도도 높아 새로운 내용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실력을 갈고 다듬는데 내 수업 스킬을 활용했었다. 그런 이유로 정석대로 수업을 진행하기보다는 어떻게 더 빨리 문제를 풀지, 킬러 문제는 어떤 힌트를 보고 해결해야 하는지 등 편법 같은 기술을 가르치기에 급급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영혼들을 가르치게 되다니!


타락하고 닳고 닳아 이미 대치동의 생리를 제대로 꿰뚫고 있는 내게 진정한 선생의 자세를 일깨워 준 신선한 경험이었다. 학교 내에서 5, 6등급 정도도 간당간당한 이 아이들에게 내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등급을 올려주고 과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정직한 과목인지 일깨우고 싶은 의욕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래, 도전해보는 거야!


우선 좀 더 쉬운 내용으로 보충 자료와 문제를 만들고 화려한 수업 기교보다는 이해가 쉬운 단어와 공식들로 매 수업을 채워나갔다. 각 학생마다 숙제를 해오고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를까 싶으면서도 노력하는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애쓴다, 애써.


죽을 둥 살 둥 애쓰는 모습이 귀엽고 안쓰럽고 기특했다. 이제껏 왜 아무도 저 아이들은 도와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면서 이제라도 나를 만난 게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너무 자뻑인가. ^^) 수업을 마치고도 이어지는 질문 세례에 다음 수업이 지연되기도 했지만 질문을 한다는 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니 마음 한편, 최소한 전보다는 성적이 오를 것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대망에 시험 날.

쉽게 낸다는 학교 선생님의 말씀은 뻥이었기에 드라마틱하게 만점이 나온다거나 갑자기 전교 등수가 치솟는 학생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준비했던 교재에서 유사 문제가 다수 나왔고 최소한 문제를 찍어서 푼 게 아니라 알고 풀었다는 점에서 다들 만족하는 것 같았다. 물론 성적이나 등수도 조금씩은 올랐기도 했으니 아이들도, 나도 만족한 시험이었다.


100점을 만들고도 내 마음을 언짢게 했던 학생이 있었던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100점 한 명 만들지 못했지만 제대로 된 시험대비를 준비하게 해 준 이 아이들은 내게 만점짜리 학생들이다. 애들아, 2021년에는 더 도약하는 해가 되렴. 늘 응원할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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