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어여쁘고 착실한 아이.
전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는 학생 하나가 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만큼 비상한 머리를 지닌 건 아니지만 하나를 알려주면 그 하나는 잊지 않는 성실한 학생. 기대한 만큼은 꼭 성과를 보여주는 아이인지라 흐뭇한 녀석이었다.
안녕하세요?
OO엄마예요. 우리 OO이가 방학 때 일정이 생겨 수업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됐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방학 때 일정이 있어서 잠시 수업을 쉬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수업 안 한다는, 그동안 감사했다는 문자.
성적이 떨어졌다면 차라리 이런 연락에 담담했을 텐데 과학 성적이 1등급인데 왜 그만둔다는 걸까?
의외로 이유로 간단했다. 이렇게 성적이 잘 나오니 혼자서 공부해도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다소 부진한 성적을 낸 영어 수업에 좀 더 투자하겠다는 얘기
억울한 마음과 약간에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못 나와도, 잘 나와도 난 버림받는 거야? ㅜㅜ 더군다나 직접 전화로 통화한 것도 아닌 카톡 메시지로 통보받으니 더 기분이 좀 울적했다. 10년 넘게 이렇게 골백번을 더 당하고도 매번 까먹고 또 속상해하다니. 나도 심각한 건망증 환자인 듯하다.
다른 선생님들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이렇게 한 번 맺은 인연이 끝난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진다. 친구와 절교한 느낌이랄까? 특히 쿵짝이 잘 맞았던 학생과 헤어질 때는 참 많이 아쉽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나는 왜 저 아이에게 간절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자책이 든다.
선택받는 직업.
언젠가는 끝나야 할 관계인 것을 알면서도 늘 선택과 버림을 받는 순간 감정에 흔들림을 느낀다. 진자의 운동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마음이 언제나 잦아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특히 이번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러 어머님들과 상담을 하며 여러 얘기를 나누며 다소 주눅 든 나를 느꼈을 때 화가 났다. 충분히 최선을 다해 가르쳤으면서 뭘 죄스러워하고 혹시 싫은 얘기가 나올까 걱정하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하고 화가 났다. 그 정도에 자신도 없는 거야? 내가 그렇게 못났냐? 이런 자책...
이런 못난 자책에 시간을 보낸 후 며칠간에 여행을 보내고 돌아와 핸드폰을 켜보니 저장된 지 않은 번호로 온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 내게 아이를 맡기고 싶다는 감사한 전화와 문자에 다시 기분이 맑아졌다. ㅎㅎ 난 왜 이렇게 일희일비한 거야?
선생은 이렇게 시험 후 간담이 서늘하단다. 애들 시험 못 보면 애랑 엄마만 속상한 게 아니라고! 돈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르친 녀석들이 못 보면 내 능력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속상하답니다. 당장에 성적에 안달하지 마시고 조금만 시간을 주시는 배려와 그만둘 때도 조금만 성의 있게 해주시길. 그게 아름다운 마지막 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