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낀, 교육의 불편한 변화

by 제성훈

나의 아이들 역시 사교육이라는 불편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불편하다고 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과연 아이를 위한 길이 이 방법 밖에 없는가'라는 의구심도 한 몫할 것이다. '세상에 최고는 없을지 모르지만 최선은 있다'는 말을 격언처럼 달고 다니는 이상,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최선'은 아닐 수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아이 교육의 '최선'을 이야기할 때, '부모 표 교육'과 '선생님 표 교육' 사이에서 먼저 갈등하게 되지만, 나는 과감히 이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결론지어 버렸다. (아이 가르치는 방법을, 어찌 되었던 나보다 더 알고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결국 그렇게 되면 '좋은 선생님을 어떻게 감별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아쉽게도 나는 이 분야에서도 문외한이다. 그리고 특별히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내 배우자가 그의 엄마 네트워크에서 하는 이야기만 들어도 충분히 넘쳐나는 정보가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네트워크의 정보 수준은 알 길이 없지만)


얼마 전 아이가 학습지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하기 싫다고 떼를 썼다. 한 번 그랬으면 그려려니 할텐데... 몇 번을 반복하더니 급기야 선생님이 집에 왔는데도 완강히 수업을 거부해, 결국 그냥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내용이 재미없어? 어려워?"

"아니"

"그럼 왜, 선생님이 싫어?"

"응"

"왜 싫은데? 공부 많이 시켜서? 무섭게 하셔?"

"아니, 늙었어."

"어?......"


육아 선배인 우리 누나에게 전화하여 논의도 해보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젊음'과 '예쁨'이 학습동기를 유발하는데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단다. 직장 내에서 '꼰대' 계층으로 늙어가는 내 입장에서는 좀처럼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심각하게 정색하고 나이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훈육을 했지만, (내 말에 더 서럽게 운 아이를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그건 여덟 살 어린아이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차별만은 아니다.


그날 저녁, 배우자와 이 이야기를 나누며 과연 학습지를 계속 시킬지 (혹시 그 공부 자체가 싫은 걸 에둘러 그리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에 말이다.) 아님 교사를 바꾸거나, 교사 없이 우리가 그 교재로 가르칠 것인가를 논의했다.


결론은, 일단 아이에게 엄중 경고하여 현재와 같이 계속 교육받도록 했지만, 이런저런 옵션을 고민하던 중, 내 어렸을 때하고는 크게 달라진 점 한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건 온라인 상으로 쉽게 선생님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정말로 편리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교사를, 얼굴 붉히지 않고, 에둘러 다른 변명을 하지 않고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뭔가 씁쓸한 뒷 맛이 남는 것은 내가 '꼰대'이고, 소위 '라떼는 말이야'를 이야기하는 기성세대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장 파먹기로, 배우자의 책꽂이에 있는 조금은 철 지난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지금은 "관계의 시대가 아닌 네트워크의 시대"라는 말을 들으며 좀처럼 가시지 않는 씁쓸함을 더해볼 뿐이다. 오프라인이 중심이 되어, 내게 주어진 환경의 사람들과 좋든 싫든 참고 양보하며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시대가 가고, 지금은 말 그대로 무선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자신의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을 선별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교류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 가장 큰 특징은 언제나 불편하거나 필요가 없어지면, 그 혹은 그녀를 내 리스트 상에서 삭제 (Delete)할 수 있다는 것.


나의 회사 선배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라떼는 말이야'를 좀 더 이어본다면 말이다.

"예전에는 TV나 세탁기가 고장 나면, '아이코 내가 잘못 사용해서 이 비싼 물건을 망가뜨렸네'라고 말했는데."

물론 당시 고객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지금에야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5년~6년 쓰다가도 망가지면 제조사의 품질을 의심하는 세상인데 말이다.


변화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예전과 다른 큰 차이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고, 그 선택지의 평가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가전 제조사와 마찬가지로 학습지가 있고, 그 제품이나 서비스의 사용 경험은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되니 말이다. 즉, 서비스 제공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선택받고 자신의 평판을 쌓아가기 위해 고객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손쉽게 대체할 수 있는 옵션까지 제공하는 것이다. 선생님을 클릭만으로 바꿀 수 있는 형태로 말이다.


솔직히 '선생님'이란 부류의 사회 구성원에 좋은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변화가 그리 씁쓸한 것만은 아니지만, 이 하나의 단면만 보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람의 가치가 많이 훼손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우려가 된다. 학교 선생이라고 달라질까? 학습지나 학원 선생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돈과 능력만 있으면 내가 속한 지역 커뮤니티의 학교와 선생이 아닌 외국에 유학을 시킬 수도, 좀 더 낫다는 학군으로 이사 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교권의 추락이라 말하지만, 그건 그들의 인성이나 실력이 낮아서는 아닐 것이다. (일부 있기도 하겠지만, 어느 사회이건 어느 직군이건 그런 이상한 부류들은 항상 있었다.) 오히려 교육도 소비의 대상이고, 그 품질이 네트워크를 통해 오픈되는 세상이 된 것은 아닐까? (솔직히 교육을 인성이 아닌 투자로 보지 않는가?)


세상은 이미 이런 식으로 변화하고 있고, 이를 거스리는 것도 무의미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근래 화두가 되는 '온라인 개학'이, 지금이야 콘텐츠의 부실함과 교육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이런 교육의 소비화를 부추기게 되지는 않을까? 온라인 중심의 교육 체계라면 굳이 '지역 학교'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교육 기회의 평등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 풍토상, 뛰어난 소수 능력자가 랜성 상에 회자된다면, '잘하는 학교 선생의 강의'를 모두가 들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 못할 이유 또한 없는 것 같다.


다행히 '내 아이의 부모' (백번 양보해도, 생물학적 부모)라는 점은 선택지가 아니기에, 나처럼 헐렁한 사람도 아빠 노릇은 하며 살고 있지만, 사람의 가치가 '소비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은 내내 못마땅하다. 결국 '갑질'을 하지 말자는 것도 일견 소비의 대상으로 사람을 보지 말자는 것과 맥을 함께하는 것은 아닐까? 나만 이렇게 뒤늦게 자각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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