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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성훈 Jun 14. 2020

할머니의 맛없는 배추김치

그리고 김치국밥으로 지은 장송가

나는 김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총각 시절에는 거의 입에 대지를 않았고, 결혼하고 난 뒤에나 다시 맛을 보는 정도이다. 처갓집은 철마다 갖은 김장을 하기에, 배추김치나 깍두기는 물론이고 파김치, 섞박지, 오이김치  밥상에는 기본 세 가지 이상의 김치가 올라온다. 워낙 솜씨가 좋아 맛이 있는 줄 알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내가 선호하는 음식이 아니다.


"김치를 먹여야 입맛이 도는데."

"김치를 먹여야 건강해지는데."

장모님과 처이모가 집을 방문할 때면, 당신 사위 들으라는 듯이 내 처를 향해 말을 하지만, 막상 휴직하고 출근한 아내를 대신해 어린아이들 밥을 차릴 때도, 시원하게 담근 동치미나 백김치가 있는 줄 알면서도 꺼내 먹일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일부러 김치를 멀리하게 할 생각은 없음에도 말이다.


김치는 나에게 '할머니'를 연상시킨다. 정확히 말해 나를 키워주신 친가 쪽 할머니를.

'할머니' 하면 뭔가 텁텁하지만 넘치는 따뜻함, 투박하지만 깊은 음식 맛이 연상될 법도 하지만, 그건 나에게는 예외다. 나에게 할머니는 결핍 혹은 상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그렇게 정의하기로 한, 그 시절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여차여차한 사정으로 결혼을 여러 번 하셨다. 생물학적 형질을 물려주신 친할머니는 아버지 유년 시절에 소천하시어 그분의 생김새나 성품을 알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에게는 계모이고, 그런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계조모가 되는 그분 뿐이다. 


'계-'라는 단어가 참 못된 것이, 요즘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아동학대와 연루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분명 같은 행동을 하더라고 계모나 계부가 하면 뭔가 부족하거나 악의 있는 행동으로 비칠 때가 있다. 나 또한 그러해서, 당신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손주를 삼시 세끼 해 먹인 공덕은 생각지도 않은 채,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사춘기 소년 마냥, 비록 대놓고 표는 내지 않았지만, 당신이 만든 음식을 반찬 투정으로 타박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참으로 음식을 못 하는 분이셨다. 굳이 따지자면 두 가지가 문제였는데,

하나는 늘 같은 음식만 하신다는 거다. 초등학교 (나 때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 도시락 반찬은 달걀말이, 시금치, 멸치볶음, 고구마 줄기 (혹은 마늘종) 김치를 벗어난 적이 없다. 때론 조금씩 바뀌거나 뭐 하나 빠지기도 했지만, 물기도 짜내지 않아 밥을 적셨던 김치는 항상 있었다.


또한 당신께서는 여러 재료를 어울려 요리하는 법을 모르셨다. 모르셔서 안 하셨다고 믿고 싶다. 가령 달걀말이라 하면 다진 야채와 함께 붙이거나 김을 함께 넣기도 하지만, 나의 할머니는 오로지 달걀만으로 부치셨다. 시금치 나물도 오로지 시금치만... 깨를 나물에 뿌리는 건 본 적이 없고, 멸치볶음에 견과류나 꽈리고추가 들어간 적도 없다. 이쯤 되면 김치도 예상이 되는데, 내 기억이 옳다면 할머니는 배추김치만 하셨다. 총각김치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당신 혼자 만들지는 않으셨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금에 배추를 푹 절이셨기에, 겉절이에서 잘 익은 김치 식감이 났다. 밤이나 굴과 같은 다른 부재료를 넣는 법도 없으셨다. 멸치액젓, 강판에 간 무 정도만 배추에 넣어 만든 김치. 배추김치에 부추를 넣는다는 것도 학교 친구의 도시락을 통해 알게 된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말, 가족 간의 심한 다툼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결국 고모와 따로 분가하기로 하셨다. 남의 눈에는 불행한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계-'자가 불러일으키는 모든 섭섭함과 갈등을 어 버리는 전환점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젠 더는 할머니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발 분가하시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미쳐 날뛰던 못난 손주의 씻을 수 없던 불효는 평생의 응어리로 남았지만 말이다.




가족이라야 할 수 있지만, 또 가족이어서 하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 여덟 살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야 아버지의 친부였지만, 아버지 서울 상경 이후 재혼하셨으니 할머니는 아버지와 한 번도 함께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어떠한 이유로 굳이 시골집까지 처분토록 하고 계모와 이복동생을 한집에 불러 살기로 하셨던 것일까? 그리고 어머니는 그즈음부터 일을 나가기 시작하셨다. 당신이 일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할머니께 우리 남매의 양육을 맡기신 것인지, 아버지로 인해 뜻하지 않게 시집살이를 하게 되자 밖으로 도신 건지 궁금하지만 지금도 묻지 않고 있다.


 할머니께서 올 초에 돌아가셨다. 아흔도 넘기신 나이로. 세상에 사람이 죽는데 호상이 있을까 싶지만, 그 표현 말고는 달리 그려낼 바도 없다. 코로나 19로 주위에는 크게 알리지 않은 채, 아주 가까운 친지들만 모시고 장례를 치렀다.

"너도 알겠지만, 어머니(장모님)가 음식 솜씨가 좋으셨는데. 이젠... "

고모부의 말에 의아했다. 그분을 추모하려 일부러 한 말일까?, 아니면 취기에 실없이 그냥 말씀하신 걸까?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딱 한 가지 할머니 음식이 있다. 큼직큼직하게 김치를 썰어 넣어 끓인 국밥. 그 음식 역시 참 당신다운 음식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오징어를 잘게 썰어 넣거나 보글보글 끓어올랐을 때 콩나물국밥처럼 달걀을 톡 깨어 넣을만하지만, 그냥 김장김치와 밥만 넣고 끓인 국밥. 기껏해야 머리와 내장을 제거한 국물용 멸치가 추가로 들어간 정도이다. 배추 밑동으로 담근 김치를 잘게 썰어 들한 맛이 나는 시중의 김칫국과는 달리, 할머니는 배추의 푸른 잎 끝부분으로 담근 김치를 큼직하게 넣으셨기에 오히려 아주 푹 삶은 우지 쪽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소금에 이미 푹 절인 배추가 김치로 익었기에, 식감은 세상 부드러웠다.


국물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다. 멸치액젓과 갈아 넣은 무로 담근 김치의 단순함으로 인해 굳이 씻어 넣을 필요도 없고, 멸치국물이 주는 시원함과 맑은 맛은 김치의 매운맛과 더해져 속을 내려주었다. 한 톨 한 톨 차갑게 굳어버린 찬밥이 국물에 푹 끓여졌으니 굳이 토렴까지는 아니었지만 밥알은 솔솔 흩어지면서도 씹으면 스르르 부서져, 가끔 체기 비숫하게 속이 답답하고 입맛이 없을 때 할머니의 김치국밥을 먹으면 뻥 뚫리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다 커서 어른에 이 맛을 즐길 수 있었다면 해장국으로 부탁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먹어본 지 삼십 년도 다 되어가는 그 음식은 할머니의 장례식날 그렇게 내 기억 속으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었는데, 가족관계 등록부 상에는 DNA를 나누어준 관계만이 기재가 된다고 한다. 혹은 '피를 나눈 사이라 해두자'라고 행정적으로 합의한 이의 이름이 기재되거나 말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부재'가 처음 느껴다. 가족 관계 증명을 제출하면 장례비 일부 지원하는 회사 복지 제도가 있음에도 신청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아주 예전 남아있던 호적 등본 복사본이 있었지만, 굳이 그래야 싶나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고 싫었던 기억들은 어렴풋한 형태로 무뎌지고, 남았던 서운함과 마음의 상처 또한 진정 그분 때문에 생긴 것인지도 이제는 잘 모르다. 다만 세상 내가 당신의 손주였다는 공식적인 기록조차 허락하지 않으니, 당신의 김치국밥에 대한 기억이라도 이렇게 글로 남겨 내가 당신의 손주였음을 증명해야겠다는 마음만 남았다. 이로 인해, 이제는 전혀 다른 모양과 맛이지만 나의 장모님이 해주시는 김치 속에서도, 장손이라 매년 지내는 차례와 내년 기일부터 지내게 될 당신의 제삿날이 오면 당신과 당신의 김치 그리교 김치국밥이 생각날 것이다.  당신의 김치 입맛에 맞지 않다고, 그 김치 도시락에 질려 김치 자체가 싫어졌다고 계속 말할 테지만, 국밥으로는 최고의 재료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참 세상에는 무조건 부족한 것도, 절대로 맞지 않는 것도 없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가족은, 매 순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서운함도 모진 마음의 상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고 살아온 식구(食口)여서인지, 그 인연은 온전히 음식에 담기고, 장이 익어가듯 김치가 발효되어가듯, 모난 독은 사라지고 좋았던 기억은 더 좋게 익어가는지도 모르겠다.


화장을 마치고 수습한 몇 점 남지 않은 유골이 수 초만에 분쇄되었다. 이를 담은 목함을 안고 장지를 향하며, 나는 할머니의 삶이 어떠했을지 당신 입장에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그건, '우린 가족이었고, 그 관계만으로도 너무 깊어 굳이 다양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때문일 것이다.'라고, 난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김치국밥 하나만으로 당신께 가진 내 마음은 충분히 벅찰 정도로 많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육아휴직으로 삼시 세끼 아이들의 밥상을 책임지는 요즈음, 나와 아이들은 또 서로 어떠한 인연을 쌓아갈 것이며, 아이들은 또 어떠한 음식 맛으로 나를 기억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지금으로 봐서는 내가 해준 음식이 아닌, 매일 내려 소파 한편에 앉아 홀짝거리는 커피로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P.S. 우리 가족으로서, 나의 할머니로서 그 오랜 세월 고생이 많으셨다고, 당신을 위한 나의 추도문 이제야 마침표를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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