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는 EBS와 이러저러한 과제를 억지로 하고 있고, 나는 소소한 청소와 집 정리를 하는 날이다. 다만 최근 (비록 다른 형태의 글을 쓰기는 했지만)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빈도가 뜸해졌다는 생각에, 오늘은 어떠한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하루 종일 아이가 집에 있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이것도 이젠 별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일 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출장을 다녀온 기억이 났다. 신제품의 마케팅을 어떠한 방향으로 기획하고 있고, 어떠한 콘텐츠가 본사에서 제작될 것인지 유럽 법인 담당자들을 모아 워크숍을 하는 자리였다. 역시 사람 모아놓고 하는 일은 쉬운 것이 없으니, 모든 조직이나 회의가 그렇듯, 열성적인 사람들은 귀찮을 정도로 혹은 그 이상으로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하여 괴롭히고, 또 누구는 굳이 이 제품을 팔아야해? 라는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어쨌든 일은 일이니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그때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일과가 끝난 후, 사진 한 장을 올렸었다. 보통 출장지에서 난 페이스북을 하지 않지만 (일 외적인 사진을 올리면 노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날은 한 때 나와 같은 팀에서 일하다 퇴사하고 독일에 살고 있는, 후배와 함께 찍은 사진을 포스팅했다. 같은 회사에서 일했었기에, 혹 반가워할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 이국적인 독일 도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올린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내 페이스북 친구의 절반 정도는 회사 사림이다)
그 친구는 굉장히 똑똑하지만, 일하기 싫어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뭔가 과제가 생기면 이슈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핵심 유관 부서가 좋아할지, 또 반대하는 이는 어떻게 설득할지 시나리오를 그리고 핵심만 툭툭 쳐내는 스타일이다. 그런 친구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아내의 해외 발령과 승진 때문이었다. 적극적으로 외조를 하겠다며, '옳다구나. 덕분에 좀 놀아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사회에서 만난 사이이기에 퇴사의 속내를 속속들이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내를 대신해 육아의 전선에 뛰어든 것도, 이런 육아의 경험을 글로 쓴 것도 그가 먼저이다 (그는 책으로도 냈다). 삶에 있어, 그는 일정 부분 나의 선배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진짜'로 말이다. 아내와 두 아이, 네 식구가 외국에 나와 있으니, 나처럼 힘들다고 장모님에게 SOS를 날릴 수도 없고, 뭐 그 나름대로 현지 네트워크는 만들었겠지만, 친구들을 만나 기분 전환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며, '에이 차라리 돈 버는 게 쉬워'하며 한국에 돌아와 직장을 구하기도 여의치 않다.
그와는 명절 즈음에서 연락을 한다. 일 년에 두어 번 안부를 묻는 정도이다. 지난 설에, 나는 그에게 육아휴직을 할 것이라고, 그리고 너처럼 육아의 기록을 남겨볼 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우선 선배 육아 대디의 조언을 듣고 싶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직접 부딪혀보고 싶었다), 두 번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시내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손바닥 만한 시내를 돌고, 그가 태워준 차를 타고 외곽 호텔에 도착. 나도 반나절 생긴 여유에 만난 것이고, 그도 아이들을 잠시 케어하지 않아도 될 시간만큼 있었던 것이다.
호텔 앞에 정차를 하고 작별의 인사를 하고 내린 다음, 못내 아쉬운 마음에 로비에서 차라도 한 잔 더 하자 물으려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담배를 한 대 꺼내 하늘을 항해 연기를 뿜는 그의 얼굴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외로움, 버리고 온 것에 대한 뜻 모를 감정, 가령, '내가 만약 이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출장을 오고 했겠지?'라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 기어코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 모든 질문은 나로 인해 만들어졌겠지. 결국 나는, 그를 향해 돌아서 있는 나를 발견하기 전에 황급히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려, 그와 같은 길을 가겠다고, 가고 있다고 말하기가 부담스러워졌다.
외로움, 또는 '나는 더 이상 OO에 속하지 않는다'는 단절의 감정. 누군가는 이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사람을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가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가진 것을 지키려고만 하면, 내 주변의 관계에 함몰돼버리면, 단절하고 새로운 일을 결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잃고 휩쓸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난한 항해에도 닻을 내릴 수 있는 항구가 필요하듯,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함과 익숙함과 '과거'도 있어야 한다. 마음의 불순물이라고 치부해도 할 수 없지만, 한 번씩 흔들리는 감정을 쏟아내고 비울 수 있는 대상 말이다. 뭐 순서로 따지면야, 굳이 나를 만나 그의 감정이 흔들렸고, 우리의 과거가 가끔 지금의 나를 흔드니,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쌓인 감정을 그대로 방치하면 곪아버리지 않을까?
육아라는 것 또한 여러 부분에서 단절을 만들어 낸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거대한 관계는 '이전의 나'를 조금만 희생시키도록 놔두지 않는다. 아이에게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게 하거나, 아이를 위해 나 자신을 오로지 '사회 혹은 직장'에 쏟아버리도록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선택에 절대적 후회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아이가 자란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며, 단절은 우리의 생각만큼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단절은 있을지언정, 우리에게는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거기에 있음'만으로 든든한 관계가 몇 개쯤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그들은 이전의 나를 알고 있고, 그렇게 단절 이전의 나 역시 그 속에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그도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픽업하고 퇴근하는 아내를 맞이하면서, 단절에 대한 감정은 그 이전보다 더 말끔히 소진되었을 것이다. 더 아빠답게, 더 남편답게 혹은 더 주부답게 살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내가 아는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의식적으로 그 단절들에게 SNS라도 날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