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육아를 해보니 (2): 너튜브는 어찌할까?
집에서 보내는 많은 시간을 아이에게 동화책이나 권하며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똑똑한 TV 덕에 원하는 콘텐츠를 음성으로 검색할 수 있으니 스마트 폰을 숨겨 두어도 소용이 없다. 아내는 습관처럼 TV도 없애버려야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예능이며 드라마며 보고 싶은 것이 넘쳐나는데, 우리도 쉽사리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아내의 후배인 학교 선생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선생님이라 신뢰가 더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만)
"우리 시절엔 TV를 오래 보면 바보가 될 거라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잖아."
세상의 흐름은 손쉽게 막을 수도 없고, 그것을 꼭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TV에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 TV를 오래 보면 뇌의 XX 부위가 이상해져서 정신이 산만해진다는 등 역기능을 나열한 적이 있었다. TV에서 TV의 역기능을 말하는 게 좀 우습다 생각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유사한 이야기들은 스마트 폰이나 너튜브 같은 콘텐츠를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기만 한 것인가? 아이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콘텐츠를 찾는 플랫폼으로 너튜브를 찾는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땠을까?
고리타분하게 따져본다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플랫폼은 노래로 시작이 되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시'의 형식으로 말이다. 운율이 있고, 여기에 이야기를 입혀, 인쇄물 없이도 노래로 기억하여 전달해왔다.
우리에게 친숙한 소설이나 그림책은 18세기 이후에나 보편화된 형식이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니 이야기를 굳이 기억하여 전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인쇄물은 또한 길이와 형식을 제약할 필요가 없다. 이야기는 좀 더 디테일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콘텐츠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훨씬 재미있어진 것이다.
그것이 이젠 TV로, 너튜브 같은 콘텐츠 플랫폼으로, 보다 종합적인 구현이 가능한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더 재미있고, 더 디테일한 이야기꾼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같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소설책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불행히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이라는 형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던 무렵, 현혹하는 이야기로 사람을 홀린다며, 부정적 콘텐츠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는 TV가, 지금은 너튜브가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항상 재미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장된 이야기, 도를 넘는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현혹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경계한다. 아이들을 위해 당장은 옆에서 무엇을 보는지 감시하며 지켜보고, 오래 보아 눈이 상하지 않도록 단속하는 정도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일방향 콘텐츠 노출을 줄이려면 더 좋은 이야기나, 더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역시 당장은 부모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학교 혹은 등교라는 물리적 울타리가 절대적 노출량을 줄여주기 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하다) 그나마 '재현'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눈으로 본 콘텐츠를 직접 만들고자 하니, 클레이로 캐릭터 만들기에 빠진 모습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