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 이야기는 끝났다

by 제성훈

인문학적 소양 쌓기를 게을리한 탓인지, 철학계의 트렌드가 변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미셀 푸코'라는 이름을 생각해내는 데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90년대 말, 그를 읽어야 지성인으로 간주되던 시대를 학교에서 보냈지만, 난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덮어버렸다.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금, '이제는 감당할만한 내공이 쌓였겠지.'라는 생각에 집어 들었다.


그간 공부를 해서는 아니다.

난해한 문장을 헤집고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참을성이 생겼고, 모르는 문장은 '그냥 여기서 멈추자. 다른 문장을 읽다 보면 그 문맥이 이해 가겠지.'라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런 연륜이 쌓인 것이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던진 수많은 개념과 언어를 해체하는 과정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런 건 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일목요연하게 (때로는 저자보다도 더 복잡하게) 정리했기 때문이다.


다만 간략이 요약하자면, 이 책에서 언급하는 사물은 '세상' 또는 '이해의 대상 /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이며, 그리고 말(글자 혹은 언어)은 사물을 이해하는 도구이다. (물론 저자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는 아니다.)


그런데 왜 '말'일까? 억지스럽지만 '말' 외에 그림이나 음악 등 세상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다른 '기호'도 존재하는데 말이다.


푸코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말의 매력은 다음과 같다.

"소리는 실제로 하나씩 차례로 발음될 수밖에 없고, 언어는 사유를 단번에 전체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 언어는 사유를 단선적 순서에 따라 부분별로 배치하게 마련이다."

(미셀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2020), p135.)


즉, 언어는 이야기라는 구조를 갖는다.


언어란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의 언어는)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 하나씩,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전체'를 재현하는 도구이다. 그만큼 세상을 이해하는데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말은 언제나 재현의 도구였을까?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라 신선한 느낌은 떨어지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며 17세기 이후 언어의 역할이 바뀌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비잔틴 제국의 멸망 후 많은 지식인과 서적이 서구로 넘어오고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소리로서의 언어가 아닌, 글로서의 언어가 보편화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말이다.


인쇄물이 보현화 되기 전 언어는 자연의 현상, 역사적 사건 혹은 성현의 가르침을 '재현'하기 위한 구전의 역할을 했다.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닮는' 것이 목적이기에 그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한 부연 설명이 붙는다.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그 해석을 덧붙이는 종교의 언어처럼, 화자와 청자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반면 인쇄가 발달하면서 언어가 '재현'으로부터 분리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돌아보고, 맞춰볼 수 있게 되어서일까?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따지게 되고, A라는 지점에서 말한 단어와 B라는 페이지에서 언급된 단어가 다른 뜻이라는 해석이 등장한다. 같은 단어라도 콘텍스트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나누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 언어는 분리와 비평에 근간한다.


종교개혁이 인쇄술의 결과물이라는 대목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연단의 설교가 아닌, 글 속의 말씀을 읽게 되면서 그 의미를 찬찬히 살핀다. 행간을 읽기 시작하며 다시 생각해본다. 해체하고 재조합한다. 이것이 개혁 가능하게 한 밑바탕이 아니었을까?


현대사회와 참 닮은 모습이다. 같은 현상을 다르게 바라보기. 누군가의 관점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한번 비틀어보기. 하나의 생각을 주장하면 반박의 글이 나오고, 누가 맞는지 파헤치기를 한다.


그의 말대로 현대 사회의 변화는 '글'에서 시작되었을까? 좀 씁쓸하지만 현대의 철학이 어떤 의미에서 '말장난'처럼 보이는 것도 언어가 양산해낸 생각의 세계 혹은 비틀기의 체계 속에 움직였기 때문은 아닐까? 적어도 플라톤의 '이데아'가 쉬웠던 건, 그 개념도 또 이를 설명하는 방식도 이야기의 구조와 닮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대, 또 미래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갈까?


푸코의 말에 따르면 '재현'으로서의 언어는 소설에 남아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그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성공담 혹은 토닥거림... 나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전달하며 마음의 '재현', 즉 공감을 유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직도 유효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고 텍스트로 된 게시물을 읽던 시대가 가고, 영상물을 보고 이해하고 따라 하는 지금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까? 글자의 독점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듯하다. 이야기꾼으로서 언어, 엄밀히 말해 글의 입지가 또 한 번 좁아진다.


그렇다면 분리, 분석, 비평의 도구로서 언어는 또 어떠한가? 글이 제공하는 논리의 체계에서 우리는 이미 벗어나고 있다. 논리로서 혹은 언어의 구조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현상들을 소위 빅데이터, 생각과 행동의 꼬리를 무수히 많은 데이터 속에서 찾아내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기술을 AI라 부르고, 알고리즘이라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논리체계와 구조라 칭송하며 숭배하기 시작했다.


기술의 진보가 생각보다 더딜 수도 있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거부한 인간성 회귀를 부르짖겠지만 그만한 편의성과 나름의 정확성을 제고하는 변화를 우리는 끝까지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지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자립했지만, 다시 인간을 넘어선 메커니즘에 스스로 가두길 결정했다는 말이 어울리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 언어는 또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까? 언어에서 알고리즘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의 변화는 나에게 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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