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와 메를로-퐁티, 나를 결정짓는 것들에 대하여

by 제성훈

오늘은 오래간만에 맑고 포근한 일요일이라 아침부터 성북동 성곽길을 따라 산책을 다녀왔다. 도로를 접해 뻗어 올라가는 초입을 지나면 (정확히 말하면 도로가 성곽 옆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만), 성곽의 돌벽과, 흙바닥, 나무 그리고 새소리가 압도하고, 맞은편에 펼쳐진 집과 아파트, 교회 건물은 그 거리감 때문에 풍경화처럼 현실에서부터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성곽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금세 바깥으로는 북정마을로, 안쪽으로는 명륜동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다다른다. 평소 같으면 북정마을을 따라 내려오며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기거했던 심우장을 지나 성북동 초입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명륜동 방향으로 나섰다. 여태껏 그 방향으로 향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모르는 길'이고, '멀리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사람 사는 모습이 궁금해 파리의 관광지도 아닌 주택가를 몇 시간이고 지도도 없이 걸었던 시절과 대조된다. 그리고 질문한다.

왜 '새로운 길'을 굳이 마다하게 되었을까?


나이가 들면 겁이 많아져서일까? 어렸을 때 다 가본 길이라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나를 만드는 데 잉여의 정보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말하자면 '지금의 나'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 혹은 거부감은 아닐까? 안 가본 골목길 하나 걷는 일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푸코를 읽고 있던 탓인지 자꾸 구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구조주의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면, '나'라는 존재는 나를 둘러싼 공간과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내가 본 것과 경험한 것, 이를 해석하고 체득하는 방식은 내가 현재 살아가는 세계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다. 그 가치를 따르던, 반발하던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치 혹은 논쟁거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굳이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혹은 만들어간다 믿고 있는) 젊은 시절에는 이 '구조'를 파헤치기 위해 많은 것을 겪으려 한다. 그렇게 경험이 쌓여 스스로가 만들어졌다 믿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그 구조를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지키는 것 아닐까?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일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과 다른 정보는 차단하게 된다. 듣고도 거짓말로 치부한다. 혹은 목격자의 오해라 믿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가치', '지켜야 하는 신념'과 다른 것은, 설령 두 눈으로 직시하더라도,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공간 혹은 구조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눈과 귀를 닫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내가 서있는 이 공간과 바로 이 시간이 나 자신을 만든다. 선이든 악이든 나를 둘러싼 세상을 움직이는 힘 혹은 가치 체계에 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차 한 대 지나갈만한 명륜동 뒷골목, 좁고 긴 계단으로 이어진 비탈길, 붉은 벽돌의 다세대 주택이나 회색 콘크리트 벽의 낮은 단독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은 풍경을 보며, 뉴트로의 감성을 발견하든, '유열의 음악 앨범'이라는 2019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든, 아님 아직도 많은 사회적 약자를 떠올리던 그것은 내가 처한 구조와 그 구조 속의 내 위치에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한 명의 개인이란 불행한 객체 같지만, 순응하며 살아갈지 수용하되 새로운 가치 해석을 부여할지, 아니면 정면으로 맞설지는 바로 나 자신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결정론과는 다르다.


구조주의와 현상학이 서로 맞닿은 부분이 있다면 펄쩍 뛸 사람이 많겠지만, 구조라는 것이 외부에서 자아를 바라보는 관점인 반면, 현상학은 안에서 밖을 본다. 그리고 이 두 시점의 접점에는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있다. (혹은 그가 있다고 믿는다.)


'The size we perceive is, in fact, the size we judge.'

(Merleau-Ponty, [The World of Perception], Routledge (2008), p42.)


육체와 정신은 분리할 수 없으며, 우리의 감각이 받아들이는 정보들에 의해 우리는 특정한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같은 공간 안에서도 어디에 위치하느냐 또는 관찰의 대상과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느냐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달라진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는 이 세상과 어떻게 조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결국 내가 가진 정보, 경험에 따라 내가 해석한 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앞의 문장을 달리한다면, 'What I perceive is, in fact, what I judge.'인 셈이다. 세상이라는 구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주체의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나를 만드는 '세상'에 방점을 두던, 세상을 해석하는 '나'를 중시하던, 사람은 그와 함께하는 사회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린 그토록 많은 경험을 하도록 조언받아왔고, 또 누군가에게 조언하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보았나요?"라고.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오늘 성북동이 아닌 명륜동으로 향함으로써, 말하자면 나는 내가 가보지 않은 물리적 공간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나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에 아주 미세한 균열을 내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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