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사르트르, 닫힌 문을 열다

by 제성훈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장 폴 사르트르


처음 이 문구를 접한 것은 스물두 살 때였을 것이다.

때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그 시절의 보통 사람처럼) 꽤나 '성장' 혹은 '성공'이라는 단어에 집착했다.


주위를 돌아보면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사는 사람도 많고, 매스컴에는 으레 천재 이야기 혹은 엄청난 노력으로 역경을 이겨낸 성공 이야기가 넘쳐난다.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나의 경쟁력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존감만 떨어진 채 결국 남는 건 '나는 그냥저냥한 사람인가 봐.'


부모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대학시절 딱 한 번 술에 취해 당신 앞에서 넋두리를 한 적이 있다.

"좋은 아들, 성공한 아들이 되고 싶은데 실망시켜드린 것 같다고."

(이런 종류의 말을 한 것 같지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이런 나에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라는 존재에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소명 또는 능력'이란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니까.

그리고 만들어가면 되는 거니까.


그 후로 스무 해 넘는 시간을 '사회'에 던져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젠 그 '실존'이라는 단어가 몹시 무겁게 느껴진다.


내게 아무것도 주어진 것 (소위 '본질')이 없다는 건, 물질적인 비유를 들자면 작은 집 한 채 구매하는 데 부모에게 의존할 수 있는 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랄까.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다만 그만큼 답답하고 막막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물론 무섭기도 하다. 실존이라는 단어는 우연과 우발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니까, 뜻하지 않게 기회를 만날 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에 다다르지 못하기도 한다. 아는 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 노력의 결과로 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난 그저 남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다녀오는 산책길, 뜻하지 않게 오늘 실존을 맞닥뜨렸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정말 오랜만에 내 눈을 마주한 것이다.


'사납다'

내가 아는 평소의 모습으로 금세 돌아왔지만, 거울 속 첫 대면한 내 눈은 사나웠다. 먹을 것이 없음에 화가 난 맹수처럼.


내 실존은 무엇을 그렇게 무섭게 갈구하고 있을까?

얻지 못한 것, 갖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본질이 있었다면, 마치 교환 쿠폰을 내밀 듯 내 것을 마땅히 요구하고 내 것이 아닌 것은 처음부터 바라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존은 오히려 경품 추첨과 같다. '다음 기회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꼭 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반갑지도 않다. 그래서 종교가 편한 것 같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분께서 나를 위해 정해놓은 것이 있으니 말이다.


실존은 나를 끊임없이 요동치게 한다.


아주 작은 것을 손에 넣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만으로도. 그게 자존감이나 자기 효능감과 연관이 있다면 말이다. 쿨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실존'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문 (Huis Clos)'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실존의 불편한 모습처럼.

마땅히 주어지는 것 없으니 끝없이 구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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