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이야기로 부러 시작할 필요는 없지만, 마케팅에는 '북극성' 혹은 '북극성 지표'라는 말이 있다. 사업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가늠자를 뜻한다. 제품을 경험하면서 얻어야 하는 핵심 가치가 고객에게 전달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지표. 매출은 그에 따른 결과물일 뿐이다.
북극성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하루 8시간 이상, 주 5일을 회사에서 살아가다 보면 어김없이 세 가지 감정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첫째, 나의 업무가 가치 있는 일인가? (북극성을 향하는데 기여하는 일인가?)
둘째, 과연 그곳에 다다를 수 있을까?
셋째, 그런데 나의 북극성은 어디인가?
북극성, 지향점 혹은 이상향과 '나'. 어김없이 자괴감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사슬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완벽에 가까운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가야 할 곳 혹은 방향이 있다는 건, 지금은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무지개와 같아서 아무리 그 방향으로 향한들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얼마나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가? 플라톤이 제시한 '이데아'가 많은 이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반농담을 해본다. 완전한 형상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등급 외 제품과 같은 흠투성이가 된다.
또한 완벽은 '메우기'를 종용한다. 나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끝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게 한다. 하지만 될 턱이 없으니 심리적 방어장치가 마련된다. 종교와 같은 시스템이 구축되기 좋은 조건이다.
지금의 당신은 부족하지만 완전한 그분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고 구원해줄 것이다. 혹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이 글에 빗댄다면, 이데아가 발현하는 원리를 깨달으면) 불완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말하는 건 지금이 아닌 '나중'이다.
'왜 지금이면 안 되는 거지?'
반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지금의 나를 사랑할 줄 알자'라고 말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이들 사상의 근저에는 '우연'이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에 불과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카오스 이론과 가까울지 모른다. 우리의 삶은 어느 특정 시점의 환경조건에 따라 발생한 우연의 결과이다. 운명 혹은 누군가의 뜻이 아닌 환경이 우선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적인 지각이 항상 참이라 믿는다, 아니 믿어야 했다. 자신의 경험과 지각 그 이상의 추상성을 인정하는 순간, '진리' 혹은 '그분의 뜻'이 개입하고 만다. 더 큰 누군가에게 구원을 요구하는 순간 인간은 종이 되어 버린다. 지금 있는 것이 전부여야, 그것을 인정해야 나 자신이 독립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인간해방 혹은 인본주의 사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지만, 그들이 주류가 되지 못한 건 여전히 지금의 나에 만족할 수 없는 처지 때문일 것이다. 주 7일 중 5일은 일을 하고 주말은 '재충전의 시간'이라 칭하니, 일이 나를 집어삼킨 지 이미 오래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어느 한 구석 벗어나고픈 처지는 누구나 있고, 나 아닌 누군가 혹은 로또와 같은 무엇인가가 그곳에서 꺼내 주길 바란다.
지금의 내가 당면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건, 심지어 우리 모두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꽤나 큰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일인 듯하다.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폭풍우를 맞이하는 심정이랄까.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내가 지각하는 게 전부라는 건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던, 가진 걸 벗어던지고 새롭게 도전하던, 내가 아는 한에서 혹은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뜻이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지만, 벗어날 용기가 없다는 건 지금 그때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을 수밖에 없는 건 아직 인내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다짐할 수 있는 나를, 나의 주체성은 칭찬할 만하다 생각하자. 결과는 운명이 아닌 우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찌 되던 내가 선택한 결정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을 즐기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자신에 대한 토닥거림으로 말이다.
'오늘도 수고했어. 꽤 잘한 거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