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서, 나비 그리고 나

by 제성훈

철학과 종교의 차이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교가 나에게 가르쳐준 대로라면 두 학문(?)의 차이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과 이를 다루는 비중에서 갈린다. 종교철학이라는 것도 있고, 인간을 뛰어넘는 세계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형이상학도 있지만 분명 신보다는 인간, 보이지 않는 세계보다는 당장의 현실을 철학은 논하고 있다.


모태 종교의 영향이겠지만, 사후 세계를 당연시했던 나에게 철학이란 주체적인 입장에서 인생을 살아보자는 교양서쯤이었을지 모른다. 역사나 문학처럼 지금의 나를 풍족하게 만드는 장르 정도로 말이다. 왜냐면 철학자들은 설령 신의 영역을 말하더라도, 그분이 있고 없음을 논리로서 증명 또는 반박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종교는 내 뒤를 책임지는 든든한 버팀목과 같다. 영원한 끝을 부정하게 함으로써 안심하게 만든다. 그 순간에 다다르면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받아들이자는 다짐이 이어진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룬다. 사후 세계는 어떠한 모습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말이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은 하늘에서 엄청나게 밝은 빛의 기둥이 내려온다는 것. 때로는 파란색, 때로는 하얀색 등으로 말이다. 그 빛이 서늘하리만치 선명하여 가까이 다가서기 무섭지만 주저하지 않고 그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팁이다.


빛은 소위 세상을 움직이는 진리 그 자체이며, 그 속에 편입된다는 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되어 해탈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자의 서에 나온 대로라면 현세에서 아무리 착하게 살았더라도 자동 탑승하는 법은 없다. 악인에게는 빛의 기둥이 아주 짧은 시간만, 선인에게는 상당한 시간 동안 나타난다는 차이만 있을 뿐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 속으로 결단 있게 들어가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참 서운하면서도 멋진 생각이다. 선인에게 혜택은 주어지지만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다. 종교적 박애정신의 연장선에서 말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나중에 이런 빛을 보게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야겠단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한 세계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어느 방송에서 나온 이야기대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이들의 증언대로라면 그들이 본 세계와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말하는 사후세계의 모습은 꼭 닮아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저승사자를 보았다 말하고, 누군가는 천사를 보았다 한다. 그들의 증언은 닮은 듯 하지만 조금씩 다 다르다.


'우리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본 것, 경험했다는 것이 사실인가를 자문해본다. 물론 사후세계를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내용이 생각난다. 우리의 눈은, 그 속에 혈관과 신경이 촘촘히 지나고 있어 실제로 바라보는 것은 여러 선이 시야를 가린 상태라고 한다. 다만 뇌가 포토샵처럼 혈관선을 지우고 그 대신에 외부와 동일하다고 보이는 이미지를 채워 깨끗한 영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억지 주장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혹시 그러하리라 믿는 것을 보는 것은 아닐까? 마치 포토샵을 하듯, 영화 속 뻔한 플롯을 넣듯 '이 이미지에는 이런 게 들어가야지'하고 말이다.


종교마다 혹은 토속신앙에서 보이는 사후 세계의 모습이 제각각인 건, 어쩌면 존재하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채워 넣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는 이들이 본 것은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구현한,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 속에 이어진 꿈인지도 모른다.


장자의 '나비의 꿈'을 이야기해보자. 나비가 되는 꿈에서 깨어났더니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말도, 우리 스스로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온전히 인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실체를 판별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실체가 존재하는가라는 또다른 의구심을 동시에 제기하고 있지만 말이다.)


한편으론 모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질문일지 모른다. 더더욱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 지어서 말한다면 그렇다. 다만 자신이 실체라고 믿어왔던 것들에 의심이 든다면, 그런 나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문제 제기하고 싶다. 먼 끝의 이야기뿐 아니라, 당장의 내가 보았던 것들과 이를 통해 믿어왔던 것들,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 것들에 회의가 든다면 말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뇌가 만들어낸 생각의 연장이라면 현실에 더더욱 충실해야 할 것이고, 내가 믿어왔던 것들이 허상이라면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다. 끝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나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편이 덜 억울하지 않을까?


나 자신에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건 어쩌면 불행한 일일지 모른다. 하나의 믿음으로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살아간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 또한 허상이겠지만, 제각각의 형태로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실체에 다다르는 방법을 찾는다. 아직은 종교보다 철학이 좋고, 아직도 방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방황한다. 그래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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