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본 작품은 감독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드러낸다'라는 말이 종종 흘러나온다. 예전부터 나는 이 말이 불편했다.
'세계관'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크고 웅장하게 보여, 누구나 아는 철학자만큼 대단한 경지에 올라야만 운운할 자격이 있을 것 같다. 관념론, 경험론, 구조주의와 같이 '주의(~ism)' 정도의 꼬리표를 물고 한 시대를 풍미해야 세계관이라 불릴만하다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끄러워 나는 '나의 세계관은 아직 없다.' 혹은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도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중일까?
세계관이란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정의'라는 단어에 집착해온 듯하다. 시대에 따라 정의는 그 모습을 달리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정의는 무엇일까? '공정', '공정한 기회' 혹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 입시의 기회, 취업의 기회, 그리고 승진이나 성과급 보상의 기회마저도, 우리는 마땅히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기회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조작되거나 박탈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척이나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생존'에 대한 집단적인 히스테리가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가 '약자'이며,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생각한다. 외세의 침략에 살아남고, 곤궁함에 굴복하지 않고, 독재의 어두운 시절을 살아낸다. 권선징악도,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으면 언젠가 이 억울함을 단번에 풀어줄 '기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기회를 잡아야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탈 수 있다. 그래서 기회는 종종 '살아남기'와 동일시된다. '존버'를 해서 살아남아야 기회가 온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살아남기'가 우리 사회의 세계관일까? 그럼 나의 세계는 또 어떤 모습일까?
내가 바라본 세상 역시 행복한 곳은 아니다. 하루하루를 치러내야 하는 일상이 고단한 곳이다. 그리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도 그렇게 느끼는 듯하다. 문학으로만 치자면 왜 대한민국은 '에세이'가 지배하는 곳이 되었을까? '너만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니야'라는 토닥거림이 많다. 가상의 주인공이 아닌, 실재하는 누군가의 말과 글로 위로한다. 공감과 치유를 위해서는 리얼리티가 우선한다.
배고픈 어린 형제에게 치킨을 공짜로 주었다는 사장님 이야기라도 기사화되면, '그래도 아직 살만한 세상인가 봅니다.'라는 댓글이 어김없이 따라온다. '아직'이라니, 우리의 세계는 살아가기에 꽤나 피로한 곳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버트란트 러셀, [What I believe], Routledge (2010), p10)
사랑이 영감을 주고 지식이 인도하는 삶이라... 참 그럴듯한 말이다. 교과서적이기까지 하다.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역시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박애와 관용에 가깝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객관화된 관점에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지식은, 조금은 예상과 달리 과학적 지식을 일컫는다. 목적을 이루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찾는 것이 과학적 지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단에 윤리적 잣대를 대어서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철학자지만 수학자였던 그의 배경에 잘 어울린다.
나를 비껴가거나 혹은 빼앗길지 모를 기회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하는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우리에게 박애나 관용은 없다. 양보는 박탈이다. 목적의 선함으로 합리화되는 수단도 없다. 도덕성은 목적보다 우선한다. 당연한 덕목인 듯 하지만, 그도덕이란 잣대에는 '너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의 차이라면, 나와 이 사회의 세계관은 '조금 흐림'인 것이다. 적어도 러셀의 세계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지배하지 않는 비교적 평안한 세계여서 마음에 든다. 그러면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한순간 멈춰버리면 도태되는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풍요로운 시대를 누린 러셀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지만 물리적으로 죽을 가능성이 높은 사회를 살아가지 않으면서도 생존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실제 세상이 그러하기보다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 아닐까?
나의 세계는 오늘도 아름답지 못하다. 어제도 그러했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사회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러셀이 왜 박애를 말하는지 이해가 간다. 모두가 선해지면 그들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 선한 목표를 조금 그릇된 방식으로 이루려 한다면 바로 잡아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의는, 선과 악의 대결이어서 '정의롭지 못한 것'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고, 악이 실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공분을 일으키고 만다. 끝없는 싸움. 우리의 정의는 꽤나 피곤한 세계관이다.
정의와 박애, 그중 하나를 택하라면 박애를 선택할 것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세계관)이 나의 행동방식(가치관)을 전제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프랜차이즈 본사 갑질에도 맞서야겠지만 어린 형제에게 공짜 치킨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평안한 세상에 살고 싶다. 출근해 사무실 책상에 앉는 순간 또 다른 세계관과 충돌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