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성훈 Feb 11. 2022

무대가 끝나고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 아이들을 위한 무대에 보호자 자격으로 함께한 적은 있지만 어른을 위한 콘텐츠를 관람한지는 수년도 전의 일인 듯하다. 라이브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현장감 있는 공연이란 연극을 지칭한다. (가끔 내가 절대음감이 아닌가 착각하기도 한다. 잘 리코딩된 재생용 음악에 비해 음이탈, 박자 이탈을 피하기 힘든 라이브 음악은 역시나 몰입을 떨어뜨린다.)


천만 배우가 주연인 연극, 장소는 대한민국 최고의 공연장 중 하나이다. 무대는 웅장했고, 관객으로 북적인다. '아, 저렇게 무대를 구성할 수도 있구나', 예전의 무대 미술이란 장인의 목공술이었는데 이젠 빔프로젝터나 레이저 영상이 사람의 손길을 대체한다.


난 개인적으로 티켓파워 있는 배우의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원로가 된 한 배우가 주연한 (정치 성향이 강한 분이라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 않다) 햄릿에 전율을 느낀 적이 있지만, 나의 인상에 각인된 연극은 대부분 그 분야의 장인들에 의해 재연되었다.


한편으로는 그 유명세가 빚은 몰입의 방해(그가 당장 연기하는 역할이 아닌, 과거의 이미지가 자꾸 투영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기대감에 비롯한다. 스크린에 비친 모습 이상의 몫을 해낼 라는 바람 말이다 (이도 역시 유명세의 연장이다).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뒤집어씌워진 클리셰 같은 이미지의 굴레를 벗어나긴 쉽지 않다.


우리도 그러하다. 'A는 B라는 업무를 잘하는 사람', 'C는 D라는 일을 안 해보았기 때문에 맡기 꺼려진다' 등 과거의 역할 혹은 무대에 갇혀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건 좋은 말로는 '전문성'을 갖는 일이지만, 일탈을 시도하기라도 하면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따끔한 충고가 뒤따른다.


나와 우리의 무대는 생각보다 좁다.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대 혹은 관객이 필요다. 십수 년 잔뼈 굵은 연극계 베테랑도 스크린에 등장하면 신인배우가 . 이런 변신은 노력 더하기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대로 받아주는, '그를 잘 모르던 사람'로 인해 가능해진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지 모른다.

"그런데 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 것이지요?"


예전의 나였다면 "한 번뿐인 인생, 다양하게 살아보고 싶어서요."라고 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주 조금 다른 생각 덧붙인다.

"정신 나간 벌레처럼 조명 홀려, 부유하무대 위의 먼지를 마시고 싶어서"라고. 어느 프랑스 가수의 노랫말처럼 말이다.


새로운 대본으로 무대를 올라설 때의 떨림, 배가 되는 심장 소리와 묵직한 울렁증,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벅찬 감정일 거란 상상을 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진짜 무대는 어떠한 느낌일까?조명으로 반짝이며 부유하는 먼지 조각들이 아름다운건 나만의 생각일까?


이전 09화 정류장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