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은 통한다'는 희망고문 일지 모른다. 다른 기질과 배경으로 살아온 사람들 간에 오가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불러올 수밖에 없고, 한 번 베인 말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기 때문이다.
선의가 악의로 바뀌기도 하고, 따뜻한 애정이 때로는 질책으로 탈바꿈한다. 화자와 청자의 거리는 그 관계가 개인을 넘어 조직과 사회의틀에 갇힐 때 멀어지고 만다.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따른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최선' 혹은' 결과'가 의도한 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운칠기삼(運七己三)'이라며 애써 위로하는지 모른다. 세상은 욕심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크게 낙담하지 말고, 그래도 진심과 노력이 인정받을 '운 좋은 때'가 도래했을 때그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항상 최선을 다하라고 말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살아가자 마음을 다잡지만, 그 기다림이 언제고 계속된다면 인내심에 한계가 생기고 만다. 언젠가 오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소위 세상이 말하는, 거창하게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번의 찾아오는 기회를 이미 놓쳐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인생의 여행자에게는 꽤나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특히나 인생을 희극으로 살아가려는 여행자에게 말이다.
나를 태우고 곧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신호가 있다면 좋겠다
삶은 하나의 답안이 있는 게 아니라지만, 정한 목적지를 바꿔 다른 버스로 갈아타기란 여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딘가로 가겠다는 마음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칸트 같은 성실함과 이성이, 보헤미안적 방랑으로 전향되기란 쉽지 않다(내가 칸트라는 말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혹자는 앞으로 갈 길은 생각하지 말고, 이제껏 달려온 거리를 돌아보며 자신을 토닥거리라 하겠지만 이도 웬만한 정신력이 있지 않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다. 등산로 삼분의 이 정도에 다다랐을 때, 잠시 쉬며 걸어온 거리에 스스로 감탄할 수는 있다. 다다르고자 하는 목적지가 명확하고, 또 그 목적지가 현실적이라면 가능한 위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세월을 낚는 낚시꾼인 양, 되든 안되든 살아보려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일이 되는대로 흘러가도록 말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The boy said. "Remember we're in September.""The month when the great fish come, " the old man said. "Anyone can be a fisherman in May."
하루하루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5월의 젊음과 달리, 기회도 결과도 기대되지 않는 9월에 다시어부가 된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라는 뜻 아닐까?
잡을 고기가 없어도, 기껏 잡은 성과를 빼앗기더라도 어부니까 마땅히 바다에 나가 또 낚시를 하는 것이니, 스스로 9월의 어부인 양 살아가야 하려나? 한소끔 만큼의 휴식을 위해 오늘도 방문한 그 카페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베이면 스스로 아물고, 다른 싹을 틔워 가지와 잎을 뻗어가는 그들처럼, 나 스스로를 치유하고 자신에 수긍하며 살아갈 힘을, 나는 내 인생의 9월이 오면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