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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성훈 Feb 15. 2022

나의 고향은

'고향'이라는 단어가 꽤나 근사하게 들려, 서울 토박이면서도 부모 고향을 내 고향인 양 이야기하고 다닌 적이 있다. 노스탤지어라는 단어의 연상 이미지는 주로 남의 글이나 영화, 음악을 통해 학습되었다 해도 다. 그런데 '고향'이란 단어에 집착했을까?


정체성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지금의 장소' 혹은 '지금 이 순간'과 이격이 있는 정체성 말이다. 당장의 나와 다른,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이 수 있는 '고향'같은 회귀점에는 현실을 부정할 수 있 힘이 있다.


달리 말하면 고향이 없다는 건, 아니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마치 '이 지긋지긋한 회사 때려치우고 낙향해서 농사나 지으련다'와 같은, 맘에도 없는 호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더 이상 디딜 곳 없, 여기가 마지막 보루라는 현실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는 은퇴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멀쩡히 있던 집이 도시 계획에 편입되어 몇 달 만에 도로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통지 같은 느낌이다. (다행히 당장 은퇴가 닥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서낭당 나무가 굳건한 뿌리로 지키는 마을 하나 정도, 내 돌아갈 곳이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빈껍데기일수록 그런 버팀목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뿌리내린 땅에 갇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삶도 싫으니 그만 모순에 갇히고 만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이상을 꿈다. 파랑새 내 곁에 없음을 굳건히 믿으면서...


비극은 현실에서  떨어져 나갈수록 감동이 반감된다는 카를 슈미트의 말이 맞다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를 밀어내야 한다. 여행을 가거나 극장 속에 몸을 숨기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고향'이란 지독히 땅에 뿌리박은 '실재'인가 아니면 '가상'인가?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당장의 고단함을 벗어나는 도피처가 되니 말이다. 현실에 닿은 삶이 비극에 가까운 것이라면 '나의 살던 고향'따위는 진즉에 사라진 지 오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야기에 배경(말하자면 '고향')을 연결 짓는다. 마치 '베로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처럼. '저 골목에서 두 가문의 결투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을 하며 나의 비극을 떠나기 위해 남의 비극에 '실재'를 포장하고 또 감상한다. 그러고선 카타르시스라 부른다.


그러고 보니 SF 영화에는 지독한 비극이 없다. 순간의 불행만 있을 뿐이다. 같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도피하니, 이 편이 더 나은지 모른다. 끝없이 '여기'를 벗어나려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되어 고향 비슷한 곳들을 찾아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젠 희극의 시대를 꿈꾸어본다.


어릴땐 우주를 떠다니며 여행하는 꿈도 종종 꾸었는데, 이젠 그런 로맨틱함은 잠결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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