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좀처럼 쉬워지지 않는 일이 있다. 그건 어쩌면 MBTI의 첫 시작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항상 '내성적'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언제나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쉽게 앞에 나서지 못하는 아이. 한 때는 이를 부정해보고 싶었는데 MBTI는 나를 'I'만 있고 'E'는 없는 사람이란다. 어이없게도 'I' 점수가 만점인 것이다. (쓸데없이 이런데 만점을 받는다.)
그런 나는 아주 가끔,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적극적일 때가 있다. 마치 모든 일을 망치려는 듯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일 것이다 (5학년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학교에는 '의형제'를 맺는 프로그램이 시범적으로 실행되었다. 상대적으로 그럭저럭 사는 고학년 학우와 환경이 넉넉하지 못한 저학년 학생을 의형제로 맺고 보살피게 하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아마도 막내로 자란 탓에 동생을 만들어준다는 설렘에 그리도 적극적이었는지 모른다. 평소 나서는 법이 없는 아이가 적극성을 띄니 담임도 나를 그 프로그램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방과 후 나와 나의 의형제 대상자들은 (4학년과 2학년, 아니면 3학년과 1학년이었을 것이다) 교무실에 모였고 그렇게 우리 집에서의저녁 약속을 잡았다.
나도 그러했고, 당시의 교육부나 학교도 참 무지했다.
'너는 사회배려자니, 그나마 넉넉한 상급생 집에 가서 따슨 밥이라도 얻어먹으라'는 것 아닌가.
나이가 들고서야 그날 우리 집을 찾은 그 동생들의 얼굴이 어두웠던 것도,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려 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바보 같은 나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바보 같은 주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미군을 집에 초대해 한국 문화를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에 자원하게 만들었다. 아마 중학교 때였나 싶은데, 마찬가지로 교육부에 해당했던 어느 주무부처의 순진함이 빚은 결과 아니었나 싶다. 미군이 여느 주말 저녁에 이태원이 아닌 한국 가정집을 방문해 불고기나 먹고 싶었겠나, 지금 생각하면 그들의 주말을 망친 게 미안하다. 아무튼 당시의 나는 미국 사람을 코 앞에 두고 바라보는 게 신기했고, 그들과 짧게 짧게 영어로 대화를 이어간 아버지가 그저 멋있게 느껴졌을 따름이다.
그 동생들과 미군이 식사를 했던 큼직하고 네모난 식탁은 그 후로도 꽤 오랜 기간 부엌 한편을 차지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대가족으로 살아가던 그 시절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내가 혼수로 또 커다랗고 네모난 식탁을 신혼집에 들였을 때,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마음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지나간 해프닝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특히나 그 동생들에게는 의도치 않게 나쁜 기억을 남기지 않았을지 미안할 따름이다. 나도 어찌 보면 그 교육 프로그램의 피해자인 셈이지만 말이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둥글고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 애쓰고 있고, 내성적인 모습을 바꾸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불현듯 사람들 속으로 뛰어드는 우발적 행동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젠 이런 행동이 누군가에게 경계나 상처가 되지 않을지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은 조금 더 늘었다. 누군가를 위한 호의에 날이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꽤나 피곤한 일이지만, 그래도 모두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혼집에 들였던 식탁은 이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럼 이 사물도 그 상징체계가 바뀌어버린 것일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예전 그 네모난 식탁의 날 선 모서리를 아버지는 안전 때문이라며 톱으로 잘라 무디게 하셨고, 멀쩡한 가구를 망가뜨린다며 어머니는 몹시 언짢아하셨다.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나는 어느 편도 들지 못할 것이다. 어쩜 그게 현명한 방법일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