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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성훈 Feb 03. 2022

프랑스 남자

만약 먼 훗날 내가 꼭 치매란 것을 겪어야 한다면 난 스무 살 시절의 기억에 머물고 싶다.


그때가 내 인생의 어느 시점이었냐면,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파리의 어느 외곽길을, 그 밤거리를 겁도 없이 떠돌던 시절이다.


함께 딸려 나온 각설탕 끝을 에스프레소살짝 묻한 입 깨물며 인생의 연륜도 없이 그 달콤 쌉소롬함을 즐기던 시절이며, 새벽녘 줄을 서 학교 앞 빵집에서 갓 구워 나온 누룽지 맛 반쪽자리 바게트를 한 입씩 길거리서 뜯어먹던 시절이다.


아마 아내나 아이들이 알면 무척이나 서운해할 대목이다. 한 순간의 기억만이 남는 왜 자신들이 빠지는지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밖에 접하지 못했으나) 어른이 되고부터의 기억은 대부분 사라지는 듯하니 굳이 멈춰야 한다면 내 스무 살 언저리, 알지도 못하는 멋을 부리던 나만의 La Belle Epoque (라 벨 에포크, 19세기 말 파리 중심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절)만이라도 살아남 바라는 심정이다.


혹은 내가 더 이상 나이기를 멈춘다면, 지금의 내가 아닌 방향일 수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빈 껍데기만 남긴 채 無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겨울비 머금은 돌로 만든 파리의 보도블록에서 올라오는 눅눅한 도시 냄새, 떼 유니베흐시떼 도서관의 고동색 긴 열람실 책상, 따뜻한 색감의 램프 위안이 되지 않을 싶다.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당시의 내가 과연 실재하기라도 했었는지 실감 나지 않는 시절의 나.

그렇게 살아있었으나 망각해버린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명제의 패러디와 패러독스에 빠져본다.


나는 생각하지만 그때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내가 존재했기에 그때의 나를 회상할 수 있다. 기억은 왜곡되고 손상되지만 그때 그 자리에 존재했기에 그 일그러진 형상의 기억들이 살아 움직이는 거겠지.


그래도 이만치 흘러온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 아닌가. 소르본느 대학 앞 횡단보도에서 어느 견공이 싸놓은 변을 밟고 거의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던 나, 그래도 '이게 파리지'하며 마냥 새로운 세상이 신기했던 당시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의 내가, 이렇게 조각난 기억으로  나를 위로해주니 고맙다. 그런 추억이라도 남겨주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살아가고 생각하고 존재할 것이니 말이다.


언젠가 불현듯 파리가 생각나 찍었던, 파리가 아닌 곳의 사진


P.S. 파리(어지 잊었지만) 한 지하철 역에서 작별인사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긴 승혜 누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내 기억이 맞다면 이제 그 사진작가는 예순이 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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