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5시 30분, 거실 창밖으로 해넘이를 바라본다. 일부러 보려 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거실 커튼을 젖히다 눈에 걸린 붉은 노을에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진즉부터 시작과 끝에는 별다른 의미를 두고 있지 않지만,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면 조금은 멜랑꼴리 해진다. 굳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저문 녘을 인지하였다면 그 자리에 멈춰서 하늘을 한 번쯤 바라볼 것이다.
가끔은 그런 문과적인 감성이 고마울 때가 있다.
빛의 파장이나 대기권을 지날 때의 이러저러한 움직임이 아니라 그저 '붉음'에 감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때로는 그냥 아무 앞뒤 없이 '그 자체'가 아름답고 고마울 때가 있다.
카를 슈미트의 [햄릿이냐 헤쿠바냐]라는 저서(김민혜 옮김, 문학동네 (2021))를 읽고 난 후의 씁쓸한 뒷맛은, 문과생 특유의 몰상식과 미학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노을을 바라보며 그 원리를 이야기하는 과학선생을 곁에 둔 느낌이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너무 간략히 요약해버려 어처구니없다 할 수 있지만), 햄릿의 우유부단함 즉 아버지에 대한 복수, 어머니에 대한 의심을 결단 있게 풀지 못하는 모습은, 셰익스피어 당시 왕 제임스 1세의 상황과 닿아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임스 1세 아버지의 암살에 어머니인 메리 여왕이 관여했는지를 두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종교 세력 간에 다툼이 있었던 것처럼, 당시 셰익스피어는 이 사건을 햄릿으로 빗대어 극을 만들면서도 어느 한쪽 편을 들 수 없었다는 것이 카를 슈미트의 견해다. 고민과 의심만 하고 사실 확인이나 행동으로 잇지 못하는 헴릿(혹은 제임스1세)의 태생적 한계 말이다.
물론 저자도 기술하였지만, 셰익스피어의 시대적 상황을 인지한다고 해서 햄릿이라는 캐릭터가 말하는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이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노을의 발생 원리를 안다고 노을의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아주 조금, 그 작품에서 뭔가 빠져나간듯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애써 카를 슈미트의 해석을 외면할 수도 있지만, 그만 그의 계속된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당시의 연극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상연될 목적으로 제작되는 것이기에 그 시대의 가장 핫 한 이슈와, 마찬가지로 동시대가 가진 이야기의 한계 (가령 어느 한쪽을 대놓고 지지할 수 없다는 것)를 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 주변의 모든 것을 때어버리고 내 앞에 놓인, 내가 보고자 하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어진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아름다움만을, 악한 것은 그 맥락을 이해하기보다 그저 그 '악'으로서 처단해버리고 싶다. 맥락에 대한 이해는 종종 우리를 혼돈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기도 하며, 너무나도 명백한 맥락은 그만 모든 것을 시시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지도, 지나친 명석함도 독이 되어버리는 듯하다. 노을이 지면 어둠이 오고, 또 여명이 밝아지면 빛이 되돌아온다는 것만 알고 지내면 될 듯하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간단하게 재단해버리고 또 다가올 순간을 맞이하면 될 것이다. 그것이 '현명함'으로 포장될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 세상이 그렇게 두지 않는다. 우리는 해체와 분석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공정을 논하는 '시대정신'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뭐 그런들 어떠하리. 가끔은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감상하고 지나가도 말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일도 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저 내 주위의 모든 좋은 사람과 모든 좋은 것들만 담아두면 말이다. 그들을 해체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 곁에 있음을 감사하고 행복해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나는 내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고 스스로에 감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