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계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있다.
그 전환점은 나의 의도와는 상관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오기도 하고
개인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1993년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20일에 대학민국
교육의 전환점이 되었던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실시되었다.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8월과 11월에 두 번 실시하였고
학생들은 두 번의 시험중
잘 나온 성적으로
대학을 응시할 수 있었다.
안정적인 수능 정착을 위해
두 번 실시 되었지만
1차 수능에 비해
2차 수능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난이도 실패로 인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결국 한 해에 두 번 수능 시험을
보는 것은 첫 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학기초에 공부한
고 3은 대박이 나고,
천천히 공부한 후 11월에 승부를
보려고 했던 학생들은
어렵게 출제 된 수능으로 인해
쪽박이 났다는 말이
사실처럼 퍼졌다.
그리고 아예 1차를 응시하지 않고
2차만 응시한 학생들은 손해를 보았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로 수능 외국어 영역이
방해 받을까봐
학부모들이 매미 대책을 요구하고,
일부 학교의 교사들은
실제로 매미 사냥을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당일
외국어 듣기평가 시간에
보슬비가 내리면서
매미들이 일제히 울음소리를
그쳤다는말이
거짓말처럼 전해지기도 했다.
두번째 수능시험은
한 번만 보기로 결정이 되었고,
그해 1994년에 고3이 되었다.
당시 수능시험은 언어영역 60점,
수리영역 40점,
탐구영역 60점,
외국어영역 40점으로
총 200점 만점이었다.
내신성적과 상관없이
수능만 잘 보면 대학을
갈 수 있었기때문에,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내가 다니 던 고등학교의
수업은 온통
수능 문제풀이 수업이었다.
선생님들은 문제집을 들고
들어와 문제를 풀어줬고,
책가방속에는
교과서 대신 영역별
문제집이 가득했다.
그리고 탐구영역은
탐구II로 불렸는데
현재처럼 인문계열은
사회탐구 중 2개,
자연계열은 과학탐구 중
2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영역이
비율만 다르게 모두 출제되었다.
나는 인문계열로 응시를 하였는데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영역이
7:3 정도의
비율로 출제되었다.
조금 있으면 수능이
도입된 지 30년이 가까워져 간다.
나는 수능이라는
입시제도의 덕을 봤다.
수리영역에 비해
언어와 탐구영역에 강점이 있었고,
당시 수리영역의 비중은
전체 수능 점수 중 20%였다.
긴 지문을 정해진 시간에 읽고
문제를 해결하는
수능형의 문제에 적응하지 못한
내신의 고수들은
시대의 변화에 피해를 봤다.
당시 학교의 모범생이면서
내신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중
수능형 문제 적응에
실패한 학생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학생부 종합전형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모범생들은
학교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을것이고,
학교 생활,
내신성적,
교우관계 및 반장 등의
학생활동 까지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현재는 이런 학생들이
생활기록부를 바탕으로
명문 대학을 골라서 지원하고 있다.
살다보면 이런 일이
한 두번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역사의 전환점에서는
본인이 아니라 시대탓을 할 수 밖에 없는
피해자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던 건 아닌 것 같다.
학교와 회원제 독서실을 오가며
스트레스 해소를
핑계삼아 친구와 수다를 떨고,
새벽에 귀가하는 독서실
봉고차에서 내리며
어영 부영 보낸
하루를 자책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수능을 한달 여 남기고 10월 21일,
지은 지 15년 밖에 안된
성수대교가 붕괴되었다.
오전 7시쯤 벌어진 일이라
등교를 한 교실에서는
온통 이 얘기 뿐이었다.
몇몇 담임선생님들은
심각한 얼굴로 교실에
설치 된 텔레비젼으로
이 뉴스를 학생들과 함께 보았다.
뉴스에서는 추락하는 버스에 탑승하고 있던
안타까운 피해자들의 사연과 운좋게
붕괴 된 상판위에 위치해서
목숨을 건진 희비가
교차되는 사연들을 쏟아냈다.
이 사고로 3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고도 성장기에 있던 한국의 부정부패,
안전 불감증의 결과물은
하나 둘 터지기 시작했고,
기어코 이듬해에는
520명의 목숨을 앗아간
삼풍백화점 붕괴로 절정에 이르렀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원서를 접수했다.
가군에는 법대를
나군에는 사범대를 지망했다.
교사는 초등학교때부터의
꿈이라 지원을 했고,
법대 지원은 어머니 소원이라도
들어드리자는 의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법고시 합격은 부모님들이
희망하던 '사'자 돌림의 직업이자
스스로의 힘으로 흙수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다리였다.
물론, 법대를 간다고해도
사법고시를 합격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다.
그러나, 사법고시를 도전하다가
안되면 법무사가 되거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
되지않겠느냐라는
어머니의 권유는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어쨌든 법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권력을 의미했고,
그와 관련 된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해
법대에 가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가, 나군 모두 대학별 논술시험이 있었다.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운이 좋게도
두 군데 모두 합격을 했다.
법조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어머니와 사법고시가 되지 않으면
은행 등에 취직을 할 수 있다라는 말로
담임선생님은 법대 진학을 권유하셨다.
당시 사회가 고도 성장기였기 때문에
남자가 사범대에 가는 것이
선호되는 시기가 아니었다.
대기업들은 매년 엄청난 숫자로
신입사원을 뽑았고,
남자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교사를 하려고 하느냐는
인식이 있던 경제 성장기였다.
사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교사라는 꿈을 위해
사범대에 진학했다.
우습게도 IMF 이후,
순위에도 없던 남자 교사가
배우자 우선 순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못했다.
수능시험으로 입학제도가
바뀐 덕을 봤고,
IMF 이후 남자 교사의
상대적 지위도 올라감으로써
청년기에 벌어진
교육의 변화와 국가부도라는
시대의 전환점마다 의도 하지 않게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