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확신해 넌 이 세상의 빛이 될 거야

by 연승


투병 생활을 하며 헛된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글을 쓰며 그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나는 크게 성장해 있었다. 병에 걸리기 전과 후 나는 많이 변했다.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예전에 알던 네가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 죽음이 무엇인지 경험해 봤으니 당연히 변할 수밖에 없다. 나뿐만 아니라 건강이란 가장 큰 재산을 잃어본 젊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럴 것이다. 시간이 소중해졌고,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을 이길 수 있다는 걸 명심하자.


육체적 고통이 지나면 정신적 고통이 찾아온다. 정신적인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다. 한순간 모든 게 나아지는 기적은 없다고 말한 것처럼. 고통이라는 건 지속적인 성찰과 훈련이 필요하다. 일단 고통이 시작되면 모든 사람이 공통적인 질문을 한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이’ 나 역시 그랬다. 고통과 불행은 친구이다. 고통이 시작되면 불행도 같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은 고통과 불행을 겪는다. 그리고 거기서 좌절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고통의 시작 단계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현명하게 이겨내고 싶었다. 이 모든 걸 견뎌 내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 인생의 전성기였다.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일 년에 한 번 평생 가지고 갈 추억을 쌓는다. 그리고 그 추억을 얻기 위해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을 견뎌낸다. 하루가 엉망진창으로 끝나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반드시 온다. 그러나 너무 힘들다면 도망치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용서했지만, 신뢰하지 않았다. ‘상처를 받을지라도 패배하고 싶지 않다’고 계속 덤벼들면 결국 지는 건 나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나는 망가진 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도망치자. 모든 순간이 추억이 될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지나가다 총에 맞으면 “하나님이 일찍 데리고 가셨을 거야”라고 말한다. 만약 총알이 급소를 빗겨 나가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기 위해 너를 살려주신 거야”며 기도한다. 내가 백혈병에 걸렸을 때 교회 다니지 않는 지인들이 이와 같은 비교를 많이 했다. 어찌 되었든 너는 하나님과 연관 지어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결정인 운명을 기도하며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불행을 위로해주어 힘을 넣어준 사람들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살려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비전이자 사명이다.


2021년 2월 18일 백혈병 완치 판정을 받았다. 혈액 내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나를 보며 막내였던 “너도 나이를 많이 먹었구나”라고 말했다. 마지막 외래 진료, 여전히 긴장되는 발걸음으로 주치의 교수님을 만나러 방으로 들어갔다. “연승아 이식 5주년 축하해, 오늘 수치는 정상이야, 앞으로 병원 오지 않아도 돼 그래도 가끔 병원에 와서 인사하고 가, 증명서라도 있으면 하나 써 줄 텐데 그런 게 없네! 앞으로 건강관리 잘하고 조심해서 가” 교수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던 병원에서 이렇게 환하게 웃어본 적 있었나, 기분이 좋으면서 한편으론 쓸쓸했다.


이렇게 병원 생활이 끝이 나는구나. 나는 이런 허무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6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정말 다시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평생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무균실에서부터 인연이 닿아 외래 진료 올 때마다 만났던 간호사 선생님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자주 보던 환자들이 하나둘 병원에서 안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어디선가 선한 영향력을 뿜고 다닐 것이다. 6년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긴 시간이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짧게 느껴지듯, 나 역시 그렇게 느꼈다. 군대를 전역할 때 위병소를 나오던 해방감, 아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튼 나는 손 흔들어 주는 간호사 선생님들을 보며 6년 동안 병원 생활 퇴근했다. 항상 응원해주시는 그들의 포근한 다독임 덕분에 고통이 추억이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통과했다. 옆엔 외로움, 고통, 불행이 함께 했다. 종점에 도착하고 하늘을 바라보니 웃음이 나왔다. 항상 따라다니던 녀석들이 없어야 했는데, 여전히 함께 있었다.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외로움과 고통, 불행이 함께 하겠지. 그래도 가끔 행복과 기쁨이 찾아오기에 힘을 내어 산다. 누군가에겐 마지막이 되는 장소이자, 누군가에겐 시작이 되는 곳인 병원을 나오면서 그동안 나에게 못했던 말을 했다. ‘이제 시작이야, 난 확신해 넌 이 세상의 빛이 될 거야.’

keyword
이전 15화다시 태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