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죽는다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운 없는 애, 군대 전역하자마자 암 걸린 애, 불쌍하게 죽은 애 등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인생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병원에서 ‘젊어서 부럽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나이가 어리니까 체력이 좋아서 금방 이겨낼 것이란 좋은 의도였지만, 위로되지 않았다. 나는 무엇보다 청춘을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게 싫었다. 젊은 암 환자들은 신진대사가 활발해 암 전이가 더 빠르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부분 젊은 환자들은 완치 판정과 동시에 사회로 나가야 하는데, 암 환자였던 사람을 평범한 사람처럼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젊은 암 환자들은 남들보다 더 어두운 미래를 봐야 했다. 그들의 젊음을 부러워해선 안된다.
나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남들과 비교해 더 커져만 갔다. 당당하게 백혈병을 이겨내고도 ‘암 환자’라는 타이틀은 고운 시선을 가져오지 못했다. 한 없이 차가운 세상이란 걸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다. 공학 전공은 실험실을 다녀야 해야 했고, 졸업 후 현장 근무는 건강에 위험했다. 그리고 시기에 맞게 심리학을 배우고 싶어 전과 신청을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면접에 오지 말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다시 한번 잘 이야기해서 면접을 봤지만, “아픈데 학교 다닐 수 있겠어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고,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열심히 답변했지만, 결과는 이미 면접관 눈빛에 쓰여있었다.
한국 백혈병환우회에서 진행하는 인터뷰에서 나처럼 왔던 아저씨가 병을 이겨내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연승 씨, 앞으론 투병 생활에 대해 무조건 숨겨야 합니다. 사회는 정말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거예요”
안 그래도 힘든 병을 이겨냈는데, 더 큰 벽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억울하기도 했고, 막막했다. 병원에서 내가 다시 일어선다면 꼭 이루고자 했던 일들이 망상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무너지기 싫었다.
이솝우화에 있는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우는 과수원을 서성이다 높은 포도나무 가지에 달린 포도송이를 발견했다. 흐르는 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가 포도를 따기 위해 점프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여우는 쓸쓸하게 과수원을 나오면서 말했다. “어차피 신 포도여서 맛이 없을 거야” 여우는 과수원을 나오면서 포도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패에 변명했다. 나는 먹지도 못하고 쓸쓸하게 과수원을 나오는 여우가 되기 싫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내 행동에 정당화하지 않기로 했다. 실패해도 다른 분야에 도전하기로 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자기계발 서적을 보면 ‘매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꿈을 꾸고 상상해라, 그러면 이루어진다’ ‘아침 시간을 활용해라’ 등 자극적인 말이 많이 나온다. 정말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매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들었고, 상상만으로 내 현실이 극적인 변화를 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쉽게도 나에겐 이러한 글이 도움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골수이식을 마친 환자는 이식편대 숙주반응이라는 이식거부반응을 막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먹는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 약은 오전 9시와 오후 9시 열두 시간 간격으로 오차 없이 먹어야 했다. 별장에 약을 두고 와 여의도에서 파주까지 30분 만에 갔던 일화도 있다. 그 이후로 9시에 대한 강박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잠을 편하게 못 잤다. 덕분에 ‘시간’ 이란 재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시간의 공급은 완전 비탄력성으로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생산 불가능한 유일한 자원이다. 재미있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이 자원이 분배되고 있었다. 그런데 죽으면 나만 이것을 못 받는 것이다. 어린 나는 이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돌아봤는데 매일 늦잠 자고, 게임하고, 놀러 다니고, 목표 없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시간을 못 받을 생각에 억울해하고, 두려워 잠을 못 이루기도 했는데 그들은 시간을 아주 펑펑 잘 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완치 판정을 받았을 때,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9시에 일어나 약을 먹어야 했던 때를 떠올렸고, 그 시간을 5시 6시로 앞당겼다.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고 믿는다. 어떤 일을 하면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자신의 존재를 낮추는 일은 백해무익한 행위이다. 나는 내 마음에 집중하기로 했다. 병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