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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Jul 28. 2019

<액트오브킬링> 인간은 언제 동물이 되는가

액트 오브 킬링(조슈아 오펜하이머, 2014)

학원 강사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주로 고등학생과 중학생을 맡았지만 무색 찬란한 초등학생들도 종종 나의 관할이었다. 특목고 대비 학원도 스카이 입시학원도 아니었던 조그마한 동네 보습학원에서 강사의 주된 역할이란 그저 맞벌이를 하는 부모들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아이들을 잠시 봐주는 것에 불과했다.

아이들끼리는 많이 싸운다.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보통 말로 서로를 때린다. 체벌은 절대 금물이기에 아이들이 서로에게 욕을 하면 대체 이 녀석들을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이들이 곧바로 죄를 뉘우치게 만드는 마법의 문장을 알게 되었다.

“너 방금 뭐라 그랬어? 다시 한번 말해봐”

신기하게도 그 말만 들으면 잘못한 게 없다며 눈을 부라리던 아이들이 그저 세상에서 가장 죄 많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액트오브킬링도 반성하지 않는 민간인 학살의 주범자들에게 끊임없는 ‘다시 말하기’를 요구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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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내가 죄를 지은 걸까요?”

“나도 알아요. 내가 악몽을 꾸는 건 내가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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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안와르 콩고는 과거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의 민간인 학살 프로젝트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프레만(freeman) 조직의 일원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죄 없는 민간인들을 공산당원으로 몰아 처형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자신들의 학살 참여를 자랑스레 떠벌리고 있었다. 안와르 콩고는 과거 자신이 사람을 죽이던 곳에서 촬영진들에게 살인 시범을 보이며 춤까지 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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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 동물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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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불법 무장단체 ‘판차실라 청년회’의 수장 잡토가 직접 사냥한 동물들의 박제가 수 차례 나온다. 한낮의 사냥감에 불과했던 박제들의 눈동자와 무장단체의 무용담은 묘하게 오버랩된다. 그들에게 학살현장은 범죄현장이 아니라 평소보다 조금 더 넓은 사냥터에 불과했다. 그저 희생자들이 약자여서 죽었을 뿐이라 말한다. 약육강식의 논리.

동물의 세계에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을 지닌 자가 무참히 양민들을 도륙하는 현장에도, 그러한 과거를 그저 약육강식의 논리로 포장하는 현재의 인도네시아에도 역사가 있었다 없었다 한다. 심지어 학살에 가담했던 조직의 행사에 현 부통령이 축사까지 하는 지경이니 우리네 역사의 비극은 여기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인간은 언제 동물이 되는가. 역사 없이 사는 자는 스스로 동물이 된다. 선사와 역사를 나누는 기준이 문자인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다. 기록한 자가 역사의 승자다. 자신의 행동이, 자신들의 무반성이 기록되지 않고 전해지지 않으리라 믿는 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행동을 하게 된다. 그들의 심연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데 성공한 감독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추신
춤추며 자신의 범행을 천연덕스레 재연하던 안와르는 영화 말미 자신의 범행 현장에서 헛구역질을 해댄다.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은 아닌지 때늦은 눈물을 흘린다.

이동진은 ‘수백만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간 엄청난 비극 앞에서 학살의 집행자가 수십 년 만에 뒤늦게 흘리는 눈물은, 설혹 그게 그의 진심이라고 할지라도, 뭐 그리 중요한 일이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글쎄, 그 눈물이 가짜 눈물인지 진짜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학살극을 자서전으로까지 펴내는 어느 전직 대통령의 알츠하이머 칭병(稱病)보다야 나은 일 아니겠는가. 그는 아직 동물의 세계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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