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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Jul 29. 2019

<샤이닝> 흔적과 서사

샤이닝(스탠리 큐브릭, 1980)





“닥,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이지, 그것의 흔적이 남을 수 있단다.”

“그게 백인의 책무지, 로이드”




인디언들이 살던 곳에 지어진 호텔 오버룩의 기둥은 모두 붉은색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토렌스의 재킷에 묻은 아드보가트를 닦는 장면. 여기서 화장실의 벽은 선명하게 붉은색이다. 오버룩이 인디언들의 피 위에 지어진 건물임을 상징한다.

영화의 키워드는 ‘흔적’이다. 건물의 붉은 기둥들은 과거 인디언들이 흘린 피의 흔적이라 볼 수 있겠다. 대니의 목에 있던 붉은 멍은 과거 토렌스가 그의 아들에게 행했던 폭력의 흔적이다. 마지막으로 미로 속 추격전에서 대니가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고 숨는 장면 역시 ‘흔적’에 대한 상징이다.

모두 백인으로 이루어진 산림 경비대원들은 무전이 끊겨 분명 호텔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명백한데도 찾아오지 않는다. 여성을 상징하는 부인과 아동을 상징하는 대니의 탈출은 산림 경비대원이 아닌 흑인 주방장 할로런이 끌고 온 차량에 의해 이뤄진다.


여기서도 ‘흔적’이다. 탈출은 할로런의 주도적인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할로런이 오버룩에 왔었던 ‘흔적으로서 존재하는 차량’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할로런이 죽고 나서 남겨진 차량에 의해 말이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억압은 백인 경비대원이 아닌 흑인의 차량으로 해결된다. 약자에 대한 억압이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는 어쩌면 과거 비슷한 일을 경험한 다른 집단이 사회와 싸워 온 ‘흔적’을 통해 해결될 수도 있겠다.



쟈크 데리다



자크 데리다는 그의 저서 ||그라마톨로지||에서 목소리인 음성언어보다 그것의 ‘흔적’인 문자언어가 더 근본적이라 말한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레비 스트로스를 재료로 서구 민족주의까지 들춰낸다.

서구 정신세계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지금’, ‘여기’는 서사적 자아로서 존재하는 우리에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목소리는 ‘지금’, ‘여기’의 언어다. 반면 문자는 기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한 언어다. 본질이다.

대니가 ‘레드럼’을 중얼댈 때, 우리는 그것이 살인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니가 웬디의 립스틱을 집어 이를 문자로 옮길 때, 우리는 즉각 레드럼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자크 데리다가 음성언어보다 문자언어가 본질적이라 한 이유를 알겠는가? 본질은 흔적에 있고 흔적은 서사성을 갖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 초반부 할로런의 대사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닥,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이지, 그것의 흔적이 남을 수 있단다.”

‘지금’, ‘여기’ 사람들이 모르는 일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아무도 모를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디언들을 죽이고 그 위에 지은 건물도, 아이에게 행사한 폭력도 결국 흔적이 남는다. 비밀은 그 비밀의 ‘흔적’으로 인해 영원할 수가 없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떤 ‘흔적’이 남아도 떳떳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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