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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Aug 07. 2019

<행복한라짜로> 투석기에서 핵폭탄으로

행복한 라짜로 (알리체 로르와커, 2018)


지금 보니 포스터에 답이 있었다. ‘당신이라서’ 행복한 라짜로였구나. 엔딩씬에서 카메라를 향해 달려오던 늑대도 당신에게 라짜로의 향기가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는 메시지 아닌가 싶다. 라짜로가 라짜로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제는 무엇일까?



종교



종교 그리고 경찰. 종교는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인간 세계의 윤리를 규율하고 경찰은 공권력의 상징이자 형이하학적 세계에서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니콜라와 함께 찾아온 신부는 그저 라짜로를 보고 ‘착하구나’라고 할 뿐 소작이 금지된 것을 엄연히 알면서도 자본가와 타협할 뿐 행동하지 않는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성당 속의 수녀들은 성자가 된 나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자신들만의 비공식 미사를 진행한다는 수녀들은 종교가 그 스스로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본말 전도의 상황을 의미한다.



경찰



국가 공권력을 상징하는 경찰 역시 과거나 현재나 약자를 보호해줄 것처럼 등장해서는 정작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법으로 금지된 소작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분개하면서도 그들이 도시에서 이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라짜로가 은행에서 다 맞아 죽어서야 도착하는 현재 시점의 경찰도 마찬가지.


“저들도 결국 라짜로를 착취할거야”



은행



후작 부인은 소작농으로 하여금 일하면 일할수록 빚더미 위에 앉게 만들었다. 그것이 과거 착취의 방식이었다. 역설적으로 소작농들이 빚더미 위에 오를수록 그들과 지주의 관계는 단단해진다. 시간이 흘러 소작은 사라졌지만 은행이 그 자리를 꿰찼다. 은행은 소작농이던 지주던 가리지 않고 모두를 착취한다. 결국 후작 부인의 집안에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돌려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라짜로는 은행에서 맞아 죽게 된다.





            메시지: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비틀어




듣기로 원래 배우가 아니라 학생이라던데,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일수도


아도르노는 그의 명저 부정변증법(1966)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인간 역사의 발전에 대한 믿음에 예리한 표창을 던졌다. '역사는 야만에서 인간성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투석기에서 핵폭탄으로 발전할 뿐이다!’

역사가 발전하느냐 발전하지 않느냐에 대한 대답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맑스주의자들은 긍정할 것이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반대할 사람들이 많겠다. 다만 ‘행복한 라짜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역사가 진보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난해한 문장이 아니라 어느 시대건 간에 라짜로와 같은 성자가 있을 테니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라짜로와 같은 성자가 설 자리를 없애는 기제들만이 비동시성의 동시성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라짜로와 같은 성자들도 동시에 존재한다. 엔딩 크레딧 직전 카메라를 향해 달려오는 늑대, 라짜로와 같은 향을 맡고 흥분하여 달려오는 늑대는 당신에게만이 아닌 모든 관객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오늘 당신은 몇 명의 라짜로를 그냥 지나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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