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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Aug 14. 2019

<기생충> 민폐는 왜 민폐가 되었나

기생충(봉준호, 2019)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라’ 우리네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귀에 못 박히도록 듣던 말이다. 일본에도 ‘메이와꾸(迷惑)’라고 해서 타인에게 민폐 끼치는 행위를 극도로 기피하는 문화가 있다. 일본의 ‘메이와꾸’ 즉 ‘미혹’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타인에게 폐를 끼친다는 의미로 전화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쓰는 ‘민폐’라는 단어는 처음의 뜻과 많이 달라졌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민폐를 ‘민간에 끼치는 폐해’라 풀이한다. 민간에 끼치는 폐해라, 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민폐의 의미와는 다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민폐라는 단어는 관(官)이 민(民)에게 주던 피해를 뜻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국가가 개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의미였던 ‘민폐’가 어느새 개인이 개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의미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꾸 선을 넘어 짜증나게”


기생충(봉준호, 2019)은 선 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벤처기업 대표의 집에 기생하려다 실패한 어느 가족들을 다룬 비극이다. 선만 안 넘어오면 그 어떤 것도 괘념치 않고 넘어가려는 박 사장에게 꽤 많은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했다고 한다. 얼핏 보면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생뚱맞게 비극의 한 복판으로 휘말리는 것도 같다. 그래서 그가 죽는 장면에서 누군가는 탄식을 내뱉었다고.


이창동 감독은 영화 ‘버닝’의 개봉 후 가진 인터뷰에서 주인공 ‘벤(스티븐 연 분)’이 직접적으로 종수(유아인 분)나 해미(전종서 분)에 해를 가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벤의 삶에 대한 태도가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박사장이 ‘난 선만 안 넘어오면 뭐든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 역시 겉으로 봤을 때나 쿨하고 멋있는 거지 어찌 보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삶의 방식일 수 있다. 박 사장 같은 사람은 길을 지나가다 어느 아이가 어른에게 맞고 있는 것을 봐도 그냥 지나칠 것이다. 어찌 됐건 자신의 울타리, 자신의 선을 넘어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칸트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개인은 스스로의 행위를 다스릴 규칙을 홀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개인이 아무 규칙이나 만들어서 행동하면 사회에 혼란을 줄 테니, 칸트는 동시에 그 규칙이 ‘보편적인 규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말한다. 모두가 당신의 규칙을 따라도 세상에 혼란이 없다면 당신은 그 규칙을 받들고 살아라. 칸트의 조언은 직관적이고 논리적으로 결함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칸트의 주장은 본의 아니게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이 만든 울타리(박사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선’)만 넘어오지 않는다면,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던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수많은 극단적 개인주의자들의 탄생을 빚었기 때문이다. 정치 이슈만 나오면 ‘난 잘 모르겠어. 둘 다 맞는 말 같은데? 난 중립을 지킬래(그리고 난 그게 멋있어 보여).’라고 말하는 우리 주변의 셀 수 없는 ‘박 사장’들이 바로 그들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앨런 파커, 1982)


자신의 울타리를 높여만 가면서 타인이 자신의 울타리만 넘어오지 않길 바라고, 울타리 바깥의 세상에는 전혀 관심 없어 하는 수 많은 칸트적 자아(또는 ‘무연고적 자아’라고도 한다). 칸트적 자아는 울타리 안에만 있기에, 자신의 선 안에만 있기에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다. 그렇게 공동체는 무너진다. 극 중 박사장의 벤처기업 이름은 ‘Another Brick’이다.


Hey teacher, leave them kids alone
All in all it's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All in all you're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이봐 선생, 애들을 내버려둬
우린 어차피 벽 속에 있는 걸
우린 어차피 벽 속의 벽돌 밖에는 되지 않는 걸
- Pink Floyd,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


박사장의 벤처기업 이름과 20세기 말 인간관계의 단절과 사회의 황폐함을 다룬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OST 제목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이 겹치는 것은 우연일까?


기택네 식구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도 않고 자기 선을 잘 지키며 살았던 박 사장은 왜 칼에 맞아 죽었을까? 공동체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 때문에 공동체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공동체는 공동체와 자신 사이에 벽을 쌓는 사람으로 인해 무너진다. 민폐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그 주체가 관이 아니라 민이 되었는가? 민폐 끼치지 말자는 문언은 단순히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자는 뜻에서 그치는 것일까 혹은 ‘네 슬프고 억울한 상황과 사정이 나로 하여금 피곤하게 만들지 말아라’까지 나아가는 것일까?


누구나 자기 마음 속에 언제든 벽돌이 될 수 있는 돌 한 장을 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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