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전고운, 2017)
바닷물에서 소금기를 빼내면 더 이상 바닷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민물에 소금을 팍팍 치면 바닷물이 되지는 않는다. 미소(이솜 분)가 위스키와 담배를 잃는다면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미소의 친구가 학창 시절 사진 앞에서 눈물 섞인 술을 마신다 하더라도 미소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논의. 누군가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결단을 내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존재라 하였고(하이데거는 그래서 주저의 제목을 존재와 ‘시간’이라 하였다), 반면 누군가는 우리 인간이란 끊임없이 우리 바깥의 무엇으로부터 스스로를 채워야 간신히 존재한다고 하였다. 밥을 먹어야 존재하는 사람도 있고 술을 먹어야 존재하는 사람도 있고 섹스를 해야 존재하는 사람도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관심사에 플러그를 꼽기 전까지는 ‘텅 빈’ 존재다(그래서 사르트르는 주저의 제목을 존재와 ‘무’라 하였다).
자기 자신을 둘러싼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출애굽기에서 신이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 하니 모세는 절로 그에게 복종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 자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공녀(전고운, 2017)의 ‘미소’ 역시 완전한 단독자로 존재하지는 못한다. 그녀도 인간이기에. 다만 그녀가 ‘미소’로서 존재하는 데에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필요하지도 않다. 오직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 친구 한솔이면 충분하다. 무인도에 세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이 질문에 당신은 고민한다. 그러나 미소는 고민하지 않고 곧장 저 세 가지를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이상의 것을 무인도에 가져가려는 생각에, 가져갈 것도 못 가져가고 절망한다.
예수가 다섯 조각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천 명을 행복하게 한 것처럼, 미소도 오직 계란 하나로 친구들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 준다. 자유주의 신학자였던 H.E.G 파울루스는 고작 오병이어(五餠二魚)를 오천 명에게 나눠주려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먹을 것을 내어 놓아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미소의 계란 한 판이 시사하는 것은 그녀의 실존 방식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와 결부될 수 있다. 영화는 단순히 무소유의 행복 따위를 말하는 바가 아니다.
‘대용’과 같이 와이프도 잃고 삶에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계란으로 만든 반찬처럼 사소한 것에라도 의지하여 실존하라는 메시지를, ‘정미’ 같이 넓은 집에 풍족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려다 병 안에서 손을 빼내지 못하는 원숭이가 되지 말고 계란 한 판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자아로서 실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미소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니 되게 유니크해’ 미소의 고용인 민지가 그녀를 두고 계속하는 말이다. 미소처럼 유니크한 존재가 되기는 쉽지 않다. 너무 많은 재료로 음식을 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고, 너무 적은 재료로 음식을 하는 것 역시 실패할 확률이 높다(‘과유불급’도 원래 과한 것과 부족한 것은 똑같다는 뜻이다).
우리의 실존도 이와 비슷해서, 너무 많은 것을 통해 실존하려 하는 것도, 너무 적은 것을 통해 실존하려 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 다만 내가 ‘너무 많음’에 정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너무 적음’에 유목하고 있는지 정도는 따져 볼 수는 있다. 조금만 가운데로 움직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