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이창동, 2000)
사물이 먼저 있을까, 아니면 그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먼저 있을까? 다시 묻겠다. 나방이 먼저 있을까 아니면 ‘나방’이라는 단어가 먼저 있을까? 아마도, 아니 당연하게도 나방이 먼저 있어야 나방이라는 단어도 생기지 않을까? 애초에 나방 없이 나방이라는 단어는 있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소쉬르의 생각은 달랐다. 나방보다, 나방이라는 단어가 먼저 존재한다는 게 소쉬르의 결론이었다. 실제로 불어는 나방과 나비를 구분하지 않는다. 둘 다 ‘빠삐용’이라 한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의 정신세계에는 나방이 존재할 수 없다. 비슷한 사례로 미역이 있다. 미국인들은 미역을 다른 해초와 구분하지 않고 seaweed라 부른다. 즉 프랑스인들의 정신세계에 나방이 없는 것처럼, 미국인들의 사유에는 미역이 없다.
소쉬르의 언어철학은 훗날 레비스트로스 등의 구조주의로 발돋움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미역을 먹고 싶어도 미국인들로부터 미역을 얻을 수 없다. 모든 미국인들은 미역이 있어도 미역을 알지 못하고 모든 프랑스인들은 나방이 있어도 나방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랑그(langue)’에는 미역이, 나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역과 나방을 모르는 것은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저 그들이 미국인이고 프랑스인이기 때문이다. 구조가 개인을 결정짓는다. 좋은 사회가 좋은 사람을 만들고 나쁜 사회가 나쁜 사람을 만든다. 구조주의 철학이 진보주의자들의 무기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는 사회를 탓하는 개인을 비판하는데 반해, 진보는 개인을 탓하는 사회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압군이었던 영호(설경구 분)도 그렇다. 그가 광주로 투입되어 어느 여학생을 죽이게 되는 과정까지 단 한순간도 그의 자유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원했던 광주행이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살인이 아니었다. 군사독재정권은 총칼에 스러진 사람만 피해자로 만들지 않았다. 총칼을 들었던 사람도 피해자로 만들어버렸다.
구조가 잘못되면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피해자가 되어버린다. 군사독재정권은 총 맞은 사람도 총 든 사람도 모두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러니 구조주의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좋은 사람이 될 선택권도, 나쁜 사람이 될 선택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쁜 사람도 우린 나쁘다 말할 수 없게 된다. 학생에게 총을 쏘고 경찰이 되어 고문을 일삼는 영호에게도 우린 동정의 눈빛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메타포가 무수히 많다. 박하사탕에서 주요한 메타포는 달리는 열차와 박하사탕이다. 달리는 열차는 사람들을 싣고 어디론가 향한다. 열차에 탄 사람들은 기차를 멈춰 세울 수 없다. 기차의 행선지를 바꿀 수도 없다. 한번 기차에 탄 이상, 그 기차가 가는 곳을 따라가야만 한다. 기차는 사회고 승객은 사회의 구성원이다. 승객의 삶은 기차가 결정한다. 앞서 말한 구조주의적 맥락의 연장선이다.
영호가 살인을 하기 전, 여학생을 맞닥뜨린 장소는 기차들이 멈춰있던 선로 위였다. 그러나 여학생을 쏘면서 멈춰있던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기차의 승객 영호는 더 이상 이 기차를 멈출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를 기차에 부딪힌다.
박하사탕은 어떤 메타포일까? 아무래도 순수한 영혼으로 생각된다. 박하사탕은 다른 사탕들과 달리 그 색깔이 하얗다. 입대 전 영호는 박하사탕을 아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던 순임(문소리 분)은 영호의 군 생활 내내 박하사탕을 보낸다. 영호는 그 사탕을 병에 모아두지만 군홧발에 짓밟힌다. 순수했던 그의 영혼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정처 없이 방황하던 영호는 총을 사서 누군가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순임의 남편이 찾아와 부인의 위독함을 알린다. 영호는 순임을 찾아가는 길에 박하사탕을 사 간다. 그의 하얬던 영혼이 조금씩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아이에게 사탕을 권하는 영호. 그 사탕을 받아먹는 아이. 두 사람이 가진 영혼의 순수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병원을 찾아간 영호는 순임을 보고 진실된 눈물을 쏟는다. 아무래도 그때부터 영호는 총으로 누군가를 쏘길 포기한 듯하다.
애당초 누구 한 놈이 자기 인생을 망가뜨렸고, 그 한 놈을 죽이겠다고 총을 산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의 삶이 망가진 건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빚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구 사업이 망한 것도 영화에서는 외환위기 때문인 것으로 그려지지 않나?
마지막 장면에서 영호는 달려오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이 장면을 영호가 과거로 돌아와서 흘리는 눈물이라 생각한다. 다시 돌아가면 제대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기찻길에 몸을 던졌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렇게 돌아온 과거지만 영호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왜일까. 거대한 구조적 모순 속에서 개인이 좋은 삶을 선택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임을 깨우쳐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