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관음증
누구나 연예인에 대해 말하길 좋아한다. 처음 보는 사이에서 ‘날씨가 좋네요’ 따위의 말을 주고받는 이유는 서로 공통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사람들은 연예인 이야기를 즐겨한다. 아무리 주된 관심사가 서로 달라도 연예가 이야기는 다들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연예가 뉴스 자체가 관음증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찌라시’가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도 우리의 관음증 때문이다. 어느 문화권을 가도 영화가 인기 있는 문화 양식인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 역시 인간의 관음주의적 욕구를 채워주는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을 가도 영화가 존재함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관음적 성격이 있음을 방증하는 강력한 증거다.
그 관음증은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상술했듯 연예가 소식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관음증의 발로다. 관음증의 본질은 내가 관찰하는 대상이 나의 관찰 행위를 모르는 것에 있다. 대중은 연예인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떠들어 대지만, 당사자인 연예인들은 집단으로서 대중을 관찰할 수 없다. 관음증이라는 단어 이외에 이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찾기 어려워 보인다.
대중의 관음증은 단순히 야릇하게 연예인들을 지켜보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간혹 관음증은 알 권리라는 기막힌 포장용지가 입혀진 채로 숱한 찌라시들을 양산해내기도 한다. 최근에도 한 예능 프로듀서와 어느 배우 사이의 염문설이 찌라시로 뿌려져 처벌된 사례가 있었다.
찌라시나 연예계 소식을 접하는 대중들의 자세는 짐짓 성스러울 지경이다. 그들은 연예계 소식을 접하자마자 누가 거짓을 말하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스스로 가려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논의하기 시작하면 결론까지 다다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무척이나 신속하다. 그리고 결론이 나면 모두들 행동에 나선다. 그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한 때 우리 인터넷 문화도 공인이라는 이유로 연예인들의 인격권을 마음대로 재단했다. 실제로 연예인들의 사적 영역에 대한 대중들의 불가피한 관심이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연예인의 사생활과 공적 생활을 분리하여 판단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연예인의 성관계 영상이 유포되면 유포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자숙하던 시대가 불과 20여 년 전이니 장족의 발전이다.
공론장이 타인의 사적 영역에 기생하고 있다면 건강한 공론장이 아니다. 사적 영역의 이야기는 내밀한 것이기에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참 거짓을 따지기 힘들다. 그래서 작금의 구혜선-안재현 논란은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우리가 감히 따질 문제가 아니다. 사생활을 공론장에 가져온 것 자체부터가 문제였음을 인식하면 될 뿐 굳이 그 화로에 관심이라는 장작을 내던질 필요는 없다.
로버트 할리의 마약 투여 기사에 어느 기자가 사건과 관련 없는 로버트 할리의 성지향성을 결부시켜 제목을 달았다. 본인 딴에는 이렇게 헤드라인 뽑으면 사람들이 더 씹고 뜯기 좋아할 거라 생각했던 듯하다. 허나 누리꾼들이 비판한 것은 로버트 할리의 성지향성이 아니라 기사의 비윤리적 보도 행태였다. 마약 투여와 달리 그의 성지향성은 공론장에 오르내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특한 우리 공론장의 공유자들이 어쩌다 한 번 진위 여부를 가릴 수도 없는 말의 행진에 휘둘리는 걸 보면, 가끔씩은 요즘처럼 맥이 빠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