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존재할 권리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시대’ 최근 소설가 김훈이 어느 대담에서 우리 사회의 아픔으로 꼽은 문제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반성을 거치지 않은 채, 개인은 우리가 되어 집단적 자기 확신의 최면에 빠진다. 그래서 김훈의 주장은 어느 ‘의견’도 ‘사실’이 될 수는 없다는 식의 지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지식과 언어가 폭력으로 작동하는 지적 권위주의의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
어느 사회건 그 공동체를 지배하는 관념이 존재한다. 그 관념은 우리 모두를 한데 묶는 결속력을 제공하기도 하지만(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누군가를 죽이는 칼날이 되기도 한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할 수 있는 것도, 너무도 당연한 우리 공동체의 관념이 내 의견의 뒷배가 되어 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공동체의 관념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 사람과 그 관념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사람, 둘 줄 누가 더 자신의 ‘의견’을 ‘사실’처럼 말할까? 당연히 공동체의 변호인이다.
공동체의 관념은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가 있다. 그리고 본인이 절대 틀릴 리 없다고 생각하는 대중적 개인들은 그 의지의 손발이 되어준다. 그들은 공동체의 관념을 공격하는 사람을 짓밟고 깔아뭉갠다. 아테네의 도편 추방제가 그랬고 중세 유럽의 교회가 그러했으며 조선 시대의 성리학도 마찬가지였다.
‘식(食)과 색(色)은 인간의 본성이다.’ 허균은 하늘의 도리(天理)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성리학자들의 주장에 대놓고 어깃장을 놓았다. 고위 관직에도 여러 차례 올랐지만 세 차례나 탄핵을 당했다. 서얼들과 어울렸다, 음란행위를 일삼는다. 허균을 탄핵했던 선비들의 주장이었다.
허균은 결국 당시 권간 이이첨의 모함으로 역모의 죄를 뒤집어쓴 채 거열형(사지를 찢어서 죽이는 극형)을 당한다. 허균에게 역모의 의사도, 역모의 계획도 없었음은 지금의 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당대 권력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동체의 핵심 가치 성리학에 번번이 도전해 온 그를 옹호해 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먹고 섹스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던 그의 ‘의견’은 거룩한 하늘의 뜻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에 의해 도륙되었다.
사람들은 악플이 설리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말한다. 그 지적이 아주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악플은 그릇이자 형식에 불과하고, 그 이면에 담긴 대중의 철저한 자기 확신이야말로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속옷을 입고 안 입고, 이상한 눈빛의 사진을 올리고 안 올리고. 무의식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짓는 우리의 관념은 설리를 공동체의 기둥을 뒤흔드는 위험인으로 정의 내렸다.
그 누구도 설리의 연기를, 설리의 노래를 욕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상 범주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 자체만을 힐난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의견이 사실이 되는 시대’라는 말에는 몇 가지 단어가 빠져 있다. ‘(다수의) 의견이 사실이 되는 시대’다. 많이들 주장하면 그것이 사실이 되고 진리가 된다. 여론조사에 목을 매고 광장에 나온 사람들의 숫자에 연연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다수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내 의견의 진실성은,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가열차게 의심하며 회의한 결과로 산출되는 것이다. 다들 하는 생각이니 맞겠지, 아무도 안 하는 생각이고 행동이니 틀리고 그릇된 것이겠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양이 될지 모르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