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말입니다
신나는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 그날도 그랬다. 내가 쓴 ‘김지영이 불편한 당신에게’를 딴지일보에 기사화해도 괜찮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소정의 원고료도 주신다고 해서 덜컥 승낙했다. 그렇게 내 글은 딴지일보 메인을 장식하게 되었다. 여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글이 올라가고 달리기 시작한 댓글들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ID ‘타**’
60년대생의 이야기 였다면 남녀 모두 공감했을 것임
글쎄요. 60년대생의 이야기였으면 40년 대생들이 어이없어하지 않을까요? 그분들은 6.25를 겪으셨으니 말이죠. 그럼 40년대생의 이야기였으면 괜찮았을까요? 아니죠. 20년 대생들이 어이없어하지 않을까요? 그분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으셨으니 말이죠. 애초에 이런 식의 논리 자체가 웃기다는 거 이제는 아시겠나요? 어느 세대가 더 불행했다고 해서, 다른 세대의 불행을 말할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ID: ‘타**’
여성의 인건비가 남성의 인건비보다 싼데 사장들이 기를 쓰고 남자를 고용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일반적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하면 가격이 싸지면 수요가 많아지는 게 맞지 않나요? 설마 사장이 남자라서 같은 남자를 선호한다는 억지를 부리진 않겠죠? 사회적 비율을 맞추라고 강요하기 전에 사장들이 남자보다 여자를 더 선호하는 사회를 만들어보도록 여자들이 노력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이런 댓글까지 달릴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네요. 여성의 인건비가 남성보다 낮은 이유는 여성이 노력을 덜 해서다? 임신하면 경력 단절되죠. 경력 단절되면 일 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곳 없죠. 그래서 여성 인건비 낮은 건 생각 안 해보셨나요? ‘82년생 김지영’을 제대로 보셨다면 이런 생각을 하시기 쉽지 않을 텐데요.
ID: ‘고*****’
저기에 공감해야 한다고 공감 못하는 네가 문제라는 듯한 폭력은 그만하지? 왜 그쪽은 본인들은 맨날 폭력에 시달린다면서 남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왜 이리 둔감하지?
이건 전제의 차이입니다. ‘김지영’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에도 여성들이 직면한 유무형의 차별이 있다고 믿는 쪽입니다. 반대로 ‘김지영’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성들에게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거나,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폭력이 사실과 다르다고 믿는 쪽이시겠죠.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이창동 감독의 ‘버닝’입니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 캐릭터는 어떠한 악행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의 삶을 즐길 뿐이죠. 영화를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창동 감독은 나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때로는 벤처럼 겉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는 듯한 인물들도, 그저 그의 사는 방식 자체가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마 스스로 여성들에게 어떠한 폭력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더 이상 구조적 폭력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 82년생 김지영’은 여성들의 집단적 피해의식의 발로일 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격하게 말씀드린다면, 그 자체가 구조적 폭력에 대한 방조 내지는 방관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14년째 1등 자리를 넘겨주지 않고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 성별 임금 격차 지수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30대 40대가 되면 남녀 임금 격차는 상당히 벌어집니다(해당 통계는 주 40시간 이상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로 가정주부는 제외된 통계입니다. 키보드에서 손 떼세요). 해당 나이대는 여성이 출산 후 경력이 단절되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뿐만인가요? 대기업 임원 중 여성의 비율 역시 고작 3.6%에 그칩니다.
리벤지 포르노나 ‘도촬(불법 촬영)’ 범죄건수는 2015년 한 해에만 8869건에 달합니다. 게다가 리벤지 포르노의 경우 성폭력 처벌법으로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성폭력 처벌법 제14조는 본인이 촬영한 영상을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기 때문입니다. 기껏 명예훼손죄로 인한 처벌만 가능합니다. 이게 구조적 모순이자 폭력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구조적 폭력인가요?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폭력이라 할지라도 그 폭력이 없는 폭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내가 공감하지 못해서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폭력의 가담자 취급을 받는 게 불쾌하신가요? 그러면 적극적으로 그 폭력을 없애면 될 일입니다.
추신: 페미니즘은 그저 여성에게 구조적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일 뿐입니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남성에게도 폭력이 가해지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원내 정당 중 그나마 가장 페미니즘적 행보를 보이는 정의당이 오히려 징병제 폐지 논의에 가장 적극적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선택적으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자신들의 문제에 분노하는 것뿐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