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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Nov 29. 2019

‘사재기’ 통하는 사회

사재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허생전이 수록된 열하일기

허생은 안성에 있는 과일을, 제주에 있는 말총을 싸그리 매입하여 폭리를 취한다. 비록 허생이 자신의 수입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긴 했지만, 박지원은 허생 개인의 옳고 그름 따위를 논하기 위해 허생전을 쓴 것이 아니다. 사재기를 한 허생 이전에, 사재기가 통하는 조선 사회에 대한 비판이 주된 저술 이유라 보아야 한다.




블락비의 박경이 몇몇 가수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음원 사재기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동안 음원 사재기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실명이 거론된 적은 없었기에 그 파장은 더욱 크다. 박경의 공개 저격에 당사자들은 법적 대응을 공언하며 진실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어차피 당사자간에 할 수 있는 법적 다툼이라고 해봤자 명예훼손죄 성립 정도일 테고, 음원 사재기는 검찰에 고발해봤자 업무방해죄 성립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즉 재판정에서 실체적 진실이 드러날 가능성은 극히 낮다. 법으로 해결될 문제였으면 진즉 대형 엔터테인먼트 법무팀들이 움직였을 문제다.




음원 사재기는 차트 위에서 이뤄진다. 차트가 없는 곳에선 사재기도 없다. 그래서 음원 사재기에 대한 건강한 대응은 차트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밖에서 이뤄져야 한다. 박경에 대한 심정적 동인으로 그의 음원을 차트 상위권으로 올리려는 움직임이 최근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결국 변하는 건 없다. 차트가 문제인데 차트 위에서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윤종신은 ‘실시간 차트 확실히 문제라고 본다. 많은 사람이 확고한 취향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돕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남긴 바 있다.


사재기가 먹히는 사회=취향 없는 사회


자본주의는 소비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근대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어다. 그러나 우리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말 사이에 숨겨진 괄호를 알고 있다. (소품종) 대량생산과 (소품종) 대량소비. 핵심은 ‘대량’ 이전에 ‘소품종’에 있다.


음악은 예술이기 이전에 산업이 되었다. 산업의 참가자들은 이윤 극대화를 원한다. 이윤이 극대화되려면 원가를 절감해야 한다. 메뉴가 백 개인 식당과 메뉴가 한 개인 식당이 있다면 후자가 더 경쟁력이 있다. 일단 재료비 즉 원가가 절감되기 때문이다(백종원은 이미 자본주의를 완전히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음악 산업의 경쟁자들 역시 원가를 절감해야 한다. 그리고 원가 절감은 메뉴 축소, 즉 장르의 획일화를 거쳐 이뤄진다. Top 100이라는 차트를 만들어 음원 소비자들을 자신들의 수족관에 가둔다. 그 순간 산업 관계자들은 Top 100에 들만한 물건들만 만들면 된다.


소비자들은 차트에 순응하게 되고, 실시간 순위라는 바벨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간다. 그렇게 우리의 귀는 취향을 잃고 자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방식대로 소비하게 된다. 사재기 통하는 사회가 흘러가는 모습이다.


이게 원래는 웃긴 장면이 아니다. 진지한거다.

들뢰즈는 우리가 평평한 면이 아니라 파여있는 ‘틈’ 위에 고여 있다고 말한다. 평면 위의 물과는 달리 틈 속의 물은 그 안에 갇혀 고인다. 들뢰즈는 그게 자본주의라 말한다. 그리고 그 ‘틈’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도주 또는 탈주라 말한다. ‘나루토’에 등장하는 탈주 닌자들이 강한 이유는 그들이 ‘틈’ 속을 빠져나와 탈주했기 때문이다.


윤종신은 음원 플랫폼이 실시간 순위와 Top 100 차트의 운영을 재고(再顧)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실시간 순위, Top 100 순위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버리지 못할 것이다. 차트의 유기는 한국 음원 산업의 주도권을 버리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 해결의 열쇠는 공급자가 아니라 수요자에게 있다. 탈주하라! 차트를 떠나라! 떠먹여 주는 음악, 이유식 음악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다면 사재기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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