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토리노(클린트 이스트우드, 2008)
‘보수’와 ‘보수적 가치’는 다르다. 그건 마치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가치’가 서로 다른 단어인 것과 유사하다. ‘자본주의’는 양극화나 적자생존 등의 내재적 단점까지도 포괄하는 단어다. 반면 ‘자본주의적 가치’는 자본주의의 부작용 이전에 자본주의가 당초 추구하던 바를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보수’와 달리 ‘보수적 가치’는 민영화나 선별적 복지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보수적 가치는 ‘책임감’ ‘희생’ ‘예의’ ‘성실’을 말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도 종종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이 보수적 ‘가치’ 위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는다. 대한민국에 진짜 보수가 없다는 비판도 그와 궤를 같이한다.
그래서 우리는 보수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책임감’이나 ‘예의’, 때로는 ‘희생’이라는 보수적 가치에 대해서는 숙연한 마음마저 드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좌파인 사람들도 보수적 가치를 전달하는 영화를 보고서 때때로 먹먹한 마음까지 드는 이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직접 주연으로 분한 ‘그랜 토리노(2008)’도 그런 영화다.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최근 부인을 잃고 혼자 남은 노인이다. 성격은 까탈스럽기 그지없으며 다혈질인 그를 마을 사람 모두가 어려워한다. 그런 그의 이웃에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함께 살게 된다. 바로 ‘타오’와 ‘수’ 남매 집안이다.
타오는 동네의 아시아계 갱단으로부터 끊임없는 포섭을 당하게 되고, 자신의 이웃이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자 한국전쟁 참전용사 월트 코왈스키도 행동에 나선다. 첫 만남은 영 별로였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성실히 일하던 타오를 지켜주는 것이 삶의 마지막 사명이라 느낀 월트는 본인의 희생까지 감수하면서 행동에 나서게 된다.
조금만 수틀리는 것이 있어도 불같은 성미를 드러내는 월트를 마을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자식들까지도 어려워한다. 아니,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72년 산 그랜 토리노에는 모두들 눈독을 들인다.
월트의 보수적 언행은 다들 싫어하면서도 그 오랜 세월 동안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그랜 토리노에 대해서는 일말의 존경심까지 들게 된다. 많은 이들이 보수적인 것에 거부감이 있으면서도 보수적 ‘가치’에 대해서 만큼은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렇다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를 진보주의자에 겨냥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보수적 가치는 사라지고 가치적 보수만 남게 된 요즘, 코로나에 걸리면 주님이 치유해주시니 광장에서 집회를 하겠다던 무책임한 사도(pseudo) 보수주의자들도 이 영화에서 보고 느끼는 바가 많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