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어젠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정치적 의제가 실종된 이번 선거에서 오히려 높은 투표율이 나왔다. 특히 여당의 득표율이 높은 것을 두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표심이 여권으로 몰리는 '애국 결집 효과(rally 'round the flag')'를 들먹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최근 박원호 교수가 지적했듯 "위기에 따른 결집"이라는 설명은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한다. 그저 범지구적 위기 때문이라기에는, 총선이라는 감초를 씹으면 씹을수록 나오는 단물이 너무도 쓰다.
무엇이 공룡여당을 만들었나? 무엇이 그토록 높은 투표율을 만들었나? 자칭 평론가니 전문가니 하는 사람들은 사전투표 전까지만 하더라도 투표율이 낮을 것이라 전망했다. 코로나 정국으로 인해 모든 정치의제가 실종되었기에 나름의 근거는 있는 전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높았던 것은 도리어 그간의 정치 의제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유항산 유항심(有恒産 有恒心)'이라는 낡은 명제를 되새겨 본다. 선비가 아니고서야 생업이 없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바른 마음을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 말을 천박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경제가 정치보다 우선한다 정도로 읽는다.
그러나 저 말을 꺼낸 사람이 다름 아닌 맹자였음에 주목해야 한다. 부국강병,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 최고의 통치 이념으로 꼽히던 당대에 허리를 꼿꼿이 하고 인의(仁義)를 말한 맹자가 아니던가.
맹자가 항산을 말한 바는 경제가 우선이라는 뜻이 아니라, 정치가 먹고사는 문제와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여권은 '검찰개혁'을 말하고, 야권은 '정권 심판'을 말한다. 만약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서 이 프레임대로 선거가 진행되었다면 지금의 투표율이 나오지 못했으리라.
체온을 재고, 비닐장갑을 끼고, 2미터의 간격을 유지하는 수고를 들여서까지 유권자들이 기표소에 발을 내디딘 이유는 문재인 정부의 성공적인 방역이 다른 나라와 비교되면서 정치가 결국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였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이낙연 당선인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총선이 끝나자마자 열린우리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152석이나 창출해 낸 열린우리당은 왜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았나? 열린우리당은 과반 의석을 만들어 내자마자 소위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 진상 규명법, 언론관계법이 입법 대상으로 꼽혔다. 하나 같이 먹고사는 문제와 동 떨어진 법안들이었다. 결국 부산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백년정당'을 표방하던 원내 제1정당의 추락이었다.
미셀은 NBC의 <오늘(Today)> 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조사와 관련해 "초현실적"이라면서 탄핵조사를 주도하고 있는 민주당과 이에 맞서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 모두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나는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현재 의회에서 진행 중인 탄핵조사가 유권자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초현실적(surreal)"이라는 표현을 썼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탄핵을 주도하는 민주당이 일반 국민들에게 탄핵 이슈가 왜 중요한지 설득하는데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간접적인 비판으로 볼 수 있다.
미셀 오바마 "트럼프 탄핵 절차, 초현실적", 프레시안, 2019-12-10
선거가 끝나자마자 검찰개혁, 더불어시민당 대표 우희종의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 등이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당연히 검찰도 개혁해야 하고 국가보안법도 폐지돼야 한다. 그러나 이런 형이상학적 담론들은 정치가 먹고사는 문제와 동떨어지지 않은 위에서야 가능한 일이다.
미국 민주당이 트럼프를 탄핵시키지 못한 것은 그만큼 민주당의 정치가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보다도 당장의 권력투쟁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못 본채 하고 검찰개혁이라는 링 위에서 세력 다툼에만 골몰히 한다면 열린우리당 사태는 여야 모두에게 찾아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