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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Jan 09. 2020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소설에도 힘이 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금오신화다. 그 이전에도 산문이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만 산문이 소설로 인정되려면 서사성과 더불어 허구성이 있어야 한다. 금오신화는 그 허구성으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 될 첫 번째 자격을 갖춘 셈이다.


김시습이 살았던 조선 시대 성리학자들은 소설을 혐오했다. 이유는 앞서 언급한 허구성 때문이었다. 서거정은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에서 ‘패관소설은 유자들이 문장을 가지고 우스갯소리를 만들되, 넓은 지식을 펴기 위해서나 혹은 심심풀이를 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 주장했다. 소설은 글쓰기 중에도 그 깊이가 얕다는 일종의 조소다.


우리 인식과는 다르게 성리학은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다. 공자왈 맹자왈 읊는 사람들이나 하는 학문이라 보수적인 학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성리학은 당대 중국에서 가장 유행하던 불교와 도교의 세속 탈피적 성향에 대항하여 개발된 학문이었다. 그런 성리학자들이었기에 허구성에 입각한 글쓰기인 소설을 싫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소설은 그 어떤 문학보다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글쓰기였다. 수호전이 그랬고 홍길동전이 그랬다. 소설이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유학자들은 그저 소설이 허구 세계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배척했지만 시간이 흘러 그 배척의 이유가 달라졌다.


숱한 사화를 거쳐 정계의 중심 세력으로 급부상했던 사림파 유학자들이 어느새 초기의 개혁 사상을 상실한 채 기득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이 소설을 처음 반대했던 이유는 소설의 허구성 때문이었다. 현실 참여적인 자신들의 학문과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소설이야말로 현실 참여적 성향을 띄게 되고 성리학은 그저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즉 유교 성리학적 ‘개혁정신’이 유교 성리학적 ‘질서’가 되어버리자 외려 소설이 유교사회를 비판하는 현실 참여적 글쓰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소설의 허구성이야말로 소설의 진실성이다. 소설이 허구성을 지니는 것은 실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다뤄서가 아니다. 개연성이야말로 소설을 짓는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다. 요컨대 소설의 허구성이란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실존하지 않지만, 실존할 만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라캉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이미지의 세계를 벗어나(상상계) 언어의 세계(상징계)로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두 세계에서 인간은 분열한다. 상상계에서 나의 모습은 완벽했는데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내가 불완전한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라는 언급이 있었다. 사회의 언어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의 언어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강자가 아닌 별 볼 일 없는 ‘보통사람’들은 주류 언어체계에 완전히 포섭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분열한다. 유능한 소설가는 이 분열자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자신의 소설 속 인물로 빚어낸다. 좋은 소설 속 인물들이 대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물인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소설 속 분열하는 자아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소설은 주류 기득권의 언어에 포섭되지 못하는 방랑자들을 위로하고, 때때로 기득권에 저항하게 만드는 힘마저 제공한다. 실존 인물이 아닌 허구 인물의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더욱 그에 공감할 수 있으며, 그래서 소설 속 이야기는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공유물로 된다.


교보문고가 9 발표한 2019 베스트셀러 결산 자료(1 1~12 8 기준) 따르면 소설의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10.3%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출간 종수도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2015 75020종이었던 소설 출간 종수는 올해에 68072종으로 4 사이에  10% 떨어졌다.

- “소설의 위기?… 올해 소설 판매량 전년보다 10% 이상 하락”, 국민일보, 20191210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유감이다. 소설이 위로해  사람이 줄었던 걸까, 위로가  만한 소설이 줄었던 걸까, 아니면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 걸까. 적어도 소설에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아니길 바란다. 분열하는 우리 모두는 소설을 읽으며  소설의 주인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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