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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May 28. 2020

“콜미바이유어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2017


나는 누구인가? 내가 생각하는 나란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인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이름 석자만 내 던지는 사람은 없다. 나는 누구와 친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설명해야 상대방은 비로소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이름 석자만 말하고 헤어지는 소개팅이 없듯이, ‘나’는 나 스스로 규정되지 않기에 혼자서는 텅 비어 있는 존재다. (심지어 내 이름도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는 라캉의 거울 이론을 토대로 ‘호명 이론’을 만들어냈다. 나의 존재는 내가 규정짓지 못한다.


훈련소에 갓 들어간 이등병은 관등성명부터 배운다. 자다가 누가 깨워도 ‘88번 훈련병 홍길동’, 간부가 날 쳐다보기만 해도 ‘88번 훈련병 홍길동’. 목소리가 작으면 안된다. 나는 타인이 규정한 이름의 존재다. 더 이상 나는 없고 사회에 의해 규정된 내가 존재할 뿐이다.


비단 군대 안의 이야기가 아니다. 회사에 들어가면 ‘88번 훈련병 홍길동’은 영업3팀 홍길동 대리가 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 영희 아빠가 된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타인이 규정한 나의 모습만 남아 괴리감만 낳는다.



‘콜미바이유어네임’의 배경은 1983년 북부 이탈리아. 호모포비아라는 것도 퀴어문화가 어느 정도 하위 문화의 성격에서 벗어난 반향에 의해 구축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호모포비아랄 것도 없는, 그야말로 상징계의 언어에 퀴어가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한 시기다.


엘리오가 마르치아와 관계를 가질 때 나오는 음악 ‘words’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Words don't come easy” 상징계의 언어에 성소수자의 몫은 없다. 마치 엘리오의 어머니가 그에게 숨길 것을 종용하던 다윗의 별 목걸이처럼, 그의 성지향성도 숨겨질 수 밖에 없다. 그가 게이임을 밝히려 해도 게이의 언어가 상징계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온 올리버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성지향성을 알게 되면 정신병원에 보낼거라 단언한다. 그런 그는 엘리오가 본인을 이해해주는 부모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 말한다. 자식의 성지향성을 이해해주는 부모를 만난 것이 ‘행운’인 사회이기에, 엘리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words don’t come easy!’


서발턴은 피지배자나 피억압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담론의 측면을 보다 강조하며 계급뿐만 아니라 젠더나 인종 등 다양한 억압의 축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하는 표현. 출처 페미위키.

그런즉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서로가 만났으니 어찌나 기쁜 일인가! 영화 내내 등장하는 아름다운 화면들은 우리가 보는 세상이 아니라 스스로가 드디어 스스로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난 엘리오의 시선에서 본 풍경들이다.


하지만 엘리오가 올리버와 사랑을 나누기 전 상징계와 타협하여 마르치아와 관계를 맺었듯 올리버는 미국으로 떠나 사회가 규정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엘리오가 영화 종반부에 입은 의상에는 수 많은 얼굴들이 그려져 있다.  내가 누구인지 찾아보려해도 기표는 기의 앞에서 미끄러진다.

소년은 가장 추울 때 모닥불을 찾았지만, 모닥불 앞에 있지 않던 모든 순간이 그에게는 가장 추운 때였다. 그 어떤 상징계의 언어 속에도 나의 자리는 없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리오는 자신을 영영 떠나버린 올리버에 대한 애증의 감정으로 뒤덮여 활활 타는 모닥불을 응시한다.


너의 이름으로 내가 불려질 때 나는 가장 나 다웠다. 모닥불 앞의 소년을 엄마가 부른다. ‘엘리오!’ 사랑이 끝났음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였음을 알게 된 때 부터였다. 내가 원한 나의 이름이었던 올리버는 사라지고, 세상이 정한 나의 이름으로 불리며 나는 죽었다.


유대교 명절의 전통 의식이 시작되면서 소년은 다시 그들의 세계로 편입된다. 하마터면 송곳이 될 뻔했던 그가 다시 상징계로 포섭되는 순간 안도하는 상징계는 그에게 축복이자 저주의 메시지를 보낸다.


“해피 하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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