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이창동, 2002)
*읽기 전에
종두(설경구 분)가 공주(문소리 분)를 강간하려는 장면, 자신을 강간하려던 사람에게 애정을 느낀다는 비일상적 설정에 대한 논쟁은 이 영화가 개봉한 이래 약 이십여 년 동안 충분했으니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와 관련한 서로 다른 입장의 두 글을 댓글에서 소개할 테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홍경래 ‘장군’의 후손이라며 으스대는 종두에게 공주가 말한다. 홍경래는 장군이 아닌 반역자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두는 자신을 ‘공주’를 지키는 ‘장군’으로 칭한다.
장군도 반역자도 싸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장군은 세상을 위해 싸우지만 반역자는 세상과 싸운다는 차이가 있다. 종두는 공주의 장군이지만 세상의 반역자다.
종두는 어머님의 생신 잔치에 공주를 데려간다. 모두의 따가운 시선 속에 종두는 뜬금없는 방울새 이야기를 꺼낸다. 이름이 방울새여서 방울이 달린 새인 줄 알았는데 방울 없이 이름만 방울새더라, 하는 이야기를 하며 종두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다.
종두의 형은 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맥락 없이 꺼내냐고 성을 내지만, 실상 방울새는 기표(언어)와 기의(대상)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명제의 완벽한 물증이다. 세상은 방울새를 방울새로 규정짓지만 방울새에게는 방울이 없다. 상징계와 상상계의 충돌이다.
방울 없는 새에게 방울새라 이름 붙이는 행위에 어색하지 않은 상징계의 주류와, 실제와 다른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 불편함을 느끼는 상징계의 비주류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가 다르기에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소수자라고 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종두와 공주가 처음 대화할 때, 종두는 공주에게 ‘말 못 해?’라고 묻는다. 그랬던 종두가 어머니 생일잔치에서 무시당해 쫓겨나는 장면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공주와 대화를 뛰어넘어 싸우기까지 한다. 소수자를 다 같은 소수자라고 뭉뚱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어머니 생신 잔치에 갔던 날 밤, 공주는 종두와 관계를 갖는다. 어머니의 생신이었던 이 날은 공주의 생일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의 가족들이 밤중에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진정 사랑받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공주는, 자신에게 장애를 안긴 이 세상에 태어난 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던 사람마저 빼앗긴다.
영화는 바닥을 쓸고 있는 공주의 집안에 떠다니는 먼지가 반사하는 햇빛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같은 감독의 영화 ‘밀양(2007)’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물웅덩이에도 비친 햇빛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햇빛으로 표상되는 신의 사랑은 더러운 물웅덩이 위에도 공평하게 비춘다는 메시지. 종두의 가족과 목사는 기도할 때 땅을 보지만 종두는 기도할 때 하늘을 본다. 죄인인 자신에게도 비치는 햇볕을 고개 들어 응시한다. 비슷한 맥락이다.
상징계의 주류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곳이 오아시스일까. 방울 없는 방울새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곳이 오아시스일까.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있다. 마찬가지로 오아시스가 오아시스인 이유는 오아시스가 사막에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 내리치는 따가운 햇볕이 오아시스 위에도 공평하게 내리쬐기 때문이다.
종두는 유치장을 탈출해 나뭇가지를 제거함으로써 햇볕이 공평하게 비추지 못하던 오아시스 위로 햇볕이 드나들게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