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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Aug 07. 2020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홍원찬의 신론(神論)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 2020)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한 것이 아니다.
신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신은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 에피쿠로스가 남긴 말로 전해지나 정확한 출처는 불명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이킷으로 저장해두고 나중에 보세요.)


세상에 범람하는 폭력과 불의는 우리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한다. 그 의심의 이면에는 정의롭고 공명정대한 신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신에게 어떤 선한 의지가 있을 줄로 믿지만 차고 넘치는 불의와 악행은 그러한 믿음을 저버리게 만든다.


서두의 문장들을 에피쿠로스가 말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신이 그저 인간보다 더 높은 차원의 쾌락을 누리는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주장한 점은 사실이다. 그는 인간사의 불의를 막고 갈등을 중재하는 정의로운 신관(觀)을 부정했다. 그로 인해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에피쿠로스를 지옥의 6층에 위치한 이단 지옥에 가두어 버렸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 2020)

홍원찬 감독은 종교적 상징과 메타포로 가득 찬 영화 '곡성'을 각색한 바 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하 '다만')'를 관람한 많은 이들은 영화의 카메라 기법이나 액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물론 '다만'은 그렇게 난해한 영화도, 해석할 부분이 많은 영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이 드러내는 신에 대한 관념은 다소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레이(이정재 분)'는 '빛(Ray)’을 의미한다. 그리고 빛은 신을 의미한다. 그가 처음 등장할 때 착용한 흰 의상도 의도된 것이다. '인남(황정민 분)'은 '사람'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노래한다.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인자'는 성경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단어다. 신약에서는 예수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이나, 방금 언급한 시편의 다윗처럼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인자'를 영어 성경에서는 'son of man'이라 한다. '인남'이라는 독특한 이름은 바로 여기서 착안된 것으로 보인다. man은 인류를, son은 남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홍원찬, 2020)

죄를 짓는 인간으로서 인남, 그리고 그를 벌하려는 레이. 장발장과 그를 찾아내 벌하려는 자베르 형사가 연상된다. 엄밀히 말하면 죄를 짓는 인간과 그에게 닥쳐오는 신(Ray)의 폭력이다.


그런데 신(Ray)에게는 동기가 없다. 그의 형을 죽였다는 이유로 인남을 쫓긴 하지만, 평소에 교류가 전혀 없던 형이었다. 레이가 '란'과 대화할 때 란이 묻는다. '왜 그렇게 그놈(인남)을 원하는 거지?' 레이는 본인도 더 이상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다. 레이는 인남뿐만 아니라 형의 죽음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소아과 의사가 대표적)까지 죽인다. 신(레이)의 폭력에는 방향도 목적도 동기도 없다. 누군가 이 영화를 보고 캐릭터들의 동기가 부재하다는 평을 했는데 나는 이 역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수리공의 복장으로 처음 등장한 인남. 세상의 고장은 결국 인간이 고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 2020)

신에게 인간의 악행을 막으려는 의지가 있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게 된다. 주일마다 교회를 나가는 신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신에게는 악행을 막으려는 의지, 아니 의지 자체가 없다. 그저 우리에게 자유의지만을 선사한 채, 우리를 끝없이 시험에 들게 할 뿐이다(종반부 인남과 레이의 대화를 기억하자. 레이는 인남에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왜 그랬는지' 묻는다). 그럴수록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는' 우리의 기도는 절규로 변할 뿐이다.


트랜스젠더 '유이'(박정민 분)는 더러운 꼴 보기 싫어서 방콕에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망쳐 떠난 곳에 천국은 없었다는 말처럼, 인간이 있는 곳에 죄와 폭력이 있을 뿐이었다.


인남에게 살인을 청부하는 에이전트(박명훈 분)는 인남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그러게 얼른 마지막 한 건 하자니깐'이라며 타박한다. 마지막 한건이 레이였는지 묻는 인남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저 대답이 굉장히 모호하게 느껴진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 2020)

마지막 한 건이 과연 레이였을까. 정의를 구현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신의 폭력을 피해, 불의로 가득 찬 인간의 세상을 피해, '마지막 한 건'의 타겟은 인남 스스로가 아니었을까. 그로 인해 인남 역시 파나마의 유이, 유민보다 더한 안식을 끝끝내 누릴 수 있던 것 아니었을까.




#다만악에서구하소서 #영화다만악에서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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