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8, 연극 <오만과 편견> 인터뷰
그런 생각을 계속 해요.
공연하고, 연기하고, 연기자로 살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가치 있는 걸 내가 할 수 있을까…
무슨 역할을 하든,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내가 배우 백은혜를 처음 본 건 2018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때 나는 약 반년 전 올라온 트라이아웃 공연에서 호평을 받았던 음악극 <태일> 초연이 이태원의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올라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법 극악했던 티켓팅에서 무사히 성공을 거둔 뒤 소극장이라 부르기에도 비좁은 공간의 간이 의자에 나를 앉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무리한 일정이었다. 닷새 뒤 2018 러시아 월드컵 출장을 위해 한국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라 6월이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렵게 구한 표를 놓기도 싫었고, 지금 보지 않으면 <태일>이라는 극을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없는 시간을 짜내서 극장을 찾았다.
<태일>이라는 극의 제목처럼, <태일>은 전태일의 이야기였다. 강기둥은 전태일을 연기한다기보다 전태일 그 자신이 된 것 같았고,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그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날, 극장을 나서는 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던 건 태일의 동생, 어머니, 친구, 동료, 때로는 '적'까지 수많은 이들을 연기한 단 한 명, '태일의 목소리'였다. 나는 거기서 배우 백은혜를 처음 보았다.
<태일>이 내게 남긴 강렬한 기억을 품고 러시아에 다녀온 나는 그 해 10월, 또 하나의 강렬한 극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우란문화재단의 '우란시선' 첫 번째 작품인 <베르나르다 알바>였다. ▶관련 리뷰 여성에서 인간으로, 갇혀버린 비극의 역사를 박제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백은혜와 만났고,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게 됐다. 2020년, 연극 <오만과 편견>이 예스24 스테이지 3관에서 재연으로 올라왔을 때 망설임 없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이유였다.
그렇게 마주 앉게 된 백은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 마리 작은 새 같았다. 섬세하고 조심스러웠으나 자주 웃고 성실했다는 이야기다. 질문 하나하나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느라 찻잔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기도 하고, 고심 끝에 길게 대답하다가도 "다시, 다시 할게요!"를 외치기도 했다. 실수담을 전할 때는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제가 생각하는 단어와 움직이는 단어가 종종 다를 때가 있다"고 웃으며 고충을 털어놓는 백은혜를 보면서 이 배우가 정말 <태일>에서 내가 봤던 그 배우가 맞나 싶던 순간도 있었다.
인터뷰에서 진행한 여러 질답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무대 위 완벽한 '배우'가 아닌 자연체 '백은혜'의 앳됨을 느꼈을 때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오만과 편견> 재연 당시, 1986년생 백은혜는 출연진 중 막내였는데 "언니, 오빠들을 보면서 깨닫는 점이 많다. 사람으로서 배울 점이 많다"고 눈을 반짝였다. 2007년 데뷔해 어느덧 데뷔 14년차(인터뷰 당시 기준), 연극, 뮤지컬은 물론 매체까지 다양한 분야를 누비며 폭넓은 경험을 쌓고 있는 배우였지만 무대 밖의 그에게선 무대 위에서 보여주던 한없이 원숙한 모습과 다른 묘한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공연 시간 때문에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바쁘게 인터뷰를 진행하고 일어서던 길, "말솜씨가 없어서 인터뷰가 괜찮았을지 모르겠다"며 멋쩍어하는 그 모습에서 앞으로 더 넓은 길로 나아가게 될 배우 백은혜의 모습을 엿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당장 내일(8월 30일) 개막하는 <오만과 편견> 3연에는 백은혜가 없지만,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그와 다시 만날 차기작을 기다리며 응원을 이어가본다.
[캐스팅보드] 백은혜, “<오만과 편견>, 한 권의 책처럼 읽힐 수 있는 작품이 되길”
“옛날 책을 펴서 다시 읽어주는 것도 지금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 아닐까요?”
2020년인 지금, 200년 전 고전을 무대 위로 옮겨 풀어내고 있는 백은혜(34)는 <오만과 편견>을 보는 관객들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진다. ‘<오만과 편견>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냐’고. 29일 종연을 앞둔 연극 <오만과 편견>에서 A1 역할을 맡아 두 달 넘게 열연 중인 백은혜를 18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 권의 책처럼 읽힐 수 있는 작품이 되길
연극 <오만과 편견>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제인 오스틴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소설 출판 200주년을 기념해 배우 겸 작가 조애너 틴시가 2인극으로 각색, 2014년 9월 영국의 솔즈베리 극장에서 처음 선보여 호평을 받았고 국내에선 지난해 8월 초연됐다.
A1과 A2로 구분된 두 명의 배우가 엘리자베스(리지)와 다아시를 비롯해 극 중 등장하는 21명의 인물을 모두 연기한다. 코트의 단추를 채우거나 옷을 뒤로 젖혀 인물의 변화를 주고, 손수건이나 부채, 지팡이 등 소품을 활용하는 것만으로 다른 인물로 빠르게 전환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만큼 배우들의 열연이 필수적이다. 원작이 소설이다 보니 대사량도 많고, 순간순간 다른 인물이 되어 나레이션과 대화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난이도도 높다.
백은혜는 “대사를 굉장히 잘 외우는 편인데도 <오만과 편견>을 하다 보면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다”며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힘이 들어가서 더 안되더라.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만큼 얻은 것도 많다. 그는 “균형감각이 중요한 공연이다. 평소 내가 연기했던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는 공연이었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강조했다.
목소리를 바꾸고, 표정을 바꾸는 것만으로 순간순간 인물의 ‘변화’를 표현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백은혜는 “인물이 바뀌는 ‘순간’만 보여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같은 시간대 안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동시에 여러 명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데 중점을 뒀다는 얘기다. “영국 창작진도 그랬고, 박소영 연출도 강조한 부분”이라고 설명한 백은혜는 그 느낌을 “책 한 권을 쭉 보여주는 느낌을 살리고 싶다”는 말로 풀어냈다. “동시에 여러 명을 보여주고 싶고, 튀거나 걸리는 부분 없이 책 한 권이 휘리릭 넘어가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공연이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감각처럼,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들이 극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오만과 편견>, 지금 내게 ‘딱’ 필요했던 작품
백은혜가 무대에 다시 선 건 지난해 연극 <비 BEA> 이후 꼭 1년 여 만이다. 백은혜는 “그동안 스케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사한 경우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공연을 하게 됐는데 딱 필요할 때 좋은 작품을 만난 것 같다”고 <오만과 편견>과 함께한 소감을 전했다.
<비 BEA>를 포함해 <섬>, <베르나르다 알바>, <태일> 등 뚜렷한 메시지가 있는 강렬하고 호소력 짙은 작품들을 해왔던 백은혜에게 <오만과 편견>은 또다른 도전이었다. 박소영 연출의 권유로 <오만과 편견> 재연에 합류한 백은혜는 “그동안 해왔던 공연과 달리 조금 더 힘을 빼고 객관적으로 해야하는 공연이라 초반에는 오히려 힘들기도 했다. 힘을 어디까지 빼야하는지,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게 맞는지, 또 내가 뭘 가져가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공연뿐만 아니라 내 삶의 시간 속에서, 앞으로 걸어갈 길을 위해서 필요했던 객관적인 눈을 갖고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덧붙인 백은혜는 “이전 공연들은 하면서 많이 아프기도 하고 마음 고생도 했었는데 <오만과 편견>은 그런 게 없다. 끝나면 후련하고 ‘해냈다’ 싶은 성취감도 든다. 잘 때도 ‘아, 오늘 어떻게 했지?’ 하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그래서일까, 백은혜는 <오만과 편견>에서 맡은 배역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 공연 정말 희한하다”는 말로 말문을 연 백은혜는 “관객분들이 ‘미시즈 베넷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냐’ 그런 얘기도 해주시는데, 모든 캐릭터에 다 애착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순간순간, 공연을 마칠 때마다 조금씩 더 마음이 쓰이는 캐릭터도 생기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샬롯 루카스가 그렇다. 백은혜는 “등장하는 짧은 순간 동안 자기 호소를 해서 그런지 요새는 샬롯에게 애착이 간다. 소설에서는 마음 약한 모습이 나오지만 캐릭터에 대해 배우들끼리 얘기를 나눌 때 굉장히 현실적인 부분을 느꼈다. 샬롯이 리지에게 ‘나는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고 예쁘지도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이거고 지금 너는 이해 못하겠지만 언젠가 이해하게 될 거야’라는 얘기를 하는 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좋다. 그 순간만큼은 샬롯이 반짝였으면 좋겠다”고 애정을 담뿍 드러냈다.
A1의 상대역인 A2 역시 무수한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충도, 보람도 같다.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에 맞춰 바뀌는 상대의 연기를 지켜봐 온 백은혜는 “어느 날 (홍)우진이 오빠가 아버지인 미스터 베넷을 연기했을 때 마지막 결혼 축하 대사를 하는 순간 마음이 뭉클해지고, 또 어느 날은 (이)동하 오빠의 제인이 늘 그렇지만 무척 아름답고 우아해 보일 때가 있다. (이)형훈 오빠도 모든 배역이 잘 어울리지만 유독 콜린스를 할 때 웃음을 참기 어렵다. 내가 웃음을 정말 잘 참는 편인데 형훈 오빠의 콜린스를 보곤 코웃음을 치면서 웃어버린 적도 있다. (신)성민 오빠는 장난기가 많은 사람인데 이 작품을 하면서 장난기를 많이 억누르고 있는 것 같다. 캐서린 남작 부인을 연기하는 것을 볼 때마다 느낀다”고 함께 한 공연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만과 편견>, 무대에서 문학의 가치를 찾다
200년 전 고전을 무대로 올리는 일에는 여러 가지 고민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무대 위에서 고민하는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다. 백은혜는 “좋은 글이고 좋은 대본이지만 줄거리를 따지자면 현대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 당시는 그랬을 지 몰라도 지금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결혼 장려’나 ‘오만하지 말라, 편견 갖지 말라’ 이런 건 아니지 않나”고 되물은 뒤 “<오만과 편견>이 지금 주는 메시지가 뭘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두 명의 배우가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2시간 15분의 시간 자체가 이 작품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고 얘기했다.
그의 말대로 인터미션을 포함해 2시간 15분의 긴 시간 동안 A1과 A2 역을 맡은 두 배우는 구슬땀을 흘리며 시시각각 바뀌는 인물들을 연기해 <오만과 편견>의 이야기를 영화처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백은혜는 “그 때는 그런 시대였구나, 지금은 이런 부분이 다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극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하나의 가치이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 아닐까”라고 자문하며 “옛날 책을 다시 펴서 읽어주는 것도 지금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책 한 권을 읽는 느낌으로 재미있게 느끼거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재미를 느끼는 것, 이런 것들이 <오만과 편견>이 갖는 가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0년을 뛰어 넘어, 21세기인 지금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보고 즐거워하는 이유다. 백은혜가 출연하는 연극 <오만과 편견>은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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