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당신의 세계마저도, 연극 <보이지 않는 손>
* 기존에 썼던 글들을 백업 중입니다.
* 스포일러 없습니다.
* 2022년 초연 당시, 서울자치신문 공연 섹션에 기고했던 리뷰(원문 링크)입니다.
여기, 갇혀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닉 브라이트(김주헌/성태준 분)라는 이름의 이 미국인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재수없는 사건에 휘말려 파키스탄 무장단체에게 납치당한 채, 어디인지도 모를 감옥에 갇혀 풀려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낙관적인 기대만으로 버티기엔 상황이 녹록치 않다. 그의 무사석방에 걸린 몸값이 무려 천만 달러이기 때문이다.
9번째 시즌을 맞은 연극열전이 새롭게 선보인 연극 <보이지 않는 손>을 관통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연극 'Disgraced'로 2013년 퓰리처상 희곡 부문을 수상한 파키스탄계 미국인 극작가 에이야드 악타의 소설을 원작으로, <썬샤인의 전사들>, <햄릿>, <마우스피스> 등으로 호평을 받은 부새롬이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듯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주장한 저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 납치된 미국인 투자 전문가 닉과, 그를 납치한 파키스탄 무장단체 세력의 관계도를 어떻게 ‘조정해’ 버리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야기의 얼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실수로 잘못 납치된 닉은 자신의 몸값을 걸고 위험한 거래를 시작한다. 자신을 납치한 무장단체의 지도자 이맘 살림(김용준/이종무 분)과 행동대원 바시르(김동원/장인섭 분)가 그의 몸값으로 천만 달러를 책정했기 때문이다. 조국도, 직장도, 자신을 위해 천만 달러를 선뜻 내줄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닉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몸값 300만 달러를 1년 안에 천만 달러로 불리는 일에 뛰어든다.
극은 국제 정세와 돈의 흐름, 종교적인 신념과 철학적인 토론이 뒤섞여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바시르와 한 팀이 된 닉이 노트북 한 대로 옵션 거래에 성공해 수십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장면은 미니멀한 하이스트 무비의 한 장면처럼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극은 후반부로 갈수록 금융 스릴러의 외피를 한 꺼풀 벗어내고, 조금씩 조금씩 묵직하게 전진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심도 깊게 자본주의의 냉철한 본질을 밖으로 끄집어 낸다.
닉이 신봉하던 자본주의, 그리고 이맘 살림이 배격하던 배금주의가 정면으로 부딪혀 뒤섞이고 뭉개지는 것을 객석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현실의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이 극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가뜩이나 얼어붙었던 세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그로 인한 경기 침체의 가속화, 주가 폭락 등으로 인해 아우성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무대 위에 불투명하게 겹쳐보게 되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극의 후반부, 닉이 바시르에게 애원하는 장면은 그래서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닉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달라, 자유를 달라,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하지 않는다. 그는 바시르에게 ‘일하게 해달라’고 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들 사이의 권력 구조는 재조정되고, 자본주의라는 신앙이 그에게 등돌리면서 그는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치를 서서히 잃어가고 파괴되어 간다. 그에게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배운 바시르, 그리고 그를 감시하던 어린 조직원 다르(류원준/황규찬 분)의 변화와 교차되어 양손 가득 지폐를 움켜쥔 채 멈춰선 닉의 표정이 객석을 향하는 마지막 순간, 객석의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강력한 극이다. 4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을 맡은 배우 8명의 긴장감 넘치는 연기에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