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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상욱 Dec 26. 2017

필리핀 떡볶이 노점에서 푸드컬처디렉터로

서울시스터즈 안태양 대표 성장기

"야시장에 손님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동생은 요리하고, 저는 떡볶이 사라고 피 토할 정도로 12시간 동안 소리를 지르며 팔았죠. 그런데 거짓말처럼 모두가 지나치더라고요. 600만 원을 들여 장사를 준비했는데 딱 1인분을 팔았어요. 2500원을 벌었죠. 동생 어깨를 탁 치면서 쿨한 척 ‘장사는 원래 이런 거야’라며 남은 떡볶이를 싸서 집에 왔어요. 못 판 떡볶이를 다 버리고 설거지 하고 동생이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제 방에 들어가 문 잠그고 몇 시간 동안 엉엉 울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겪은 큰 공포, 큰 실패였어요. 달랑 2500원 남았으니 한국에 돌아올 수도 없었어요. 비행기표를 못 사잖아요. 게다가 짐 옮기느라 택시비까지 썼으니 수중에 그 돈도 없었죠."


안태양 씨가 돌아본 첫 장사의 기억이다. 2010년 3월 대박을 꿈꾸며 한국에서 일하던 동생 찬양씨를 불러 월세 보증금까지 빼 필리핀 야시장 노점에 ‘올인’한 안씨는 장사 첫날부터 다음날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겁에 질린 울음으로 밤을 꼬박 지새운 안씨는 다음날 과외 아르바이트를 가 학생 부모에게 사정해 당일 과외비를 현금으로 받아 겨우 밥값을 충당했다. 그리고 다음주 금요일 야시장에서 떡볶이 3인분을 팔았다. 그 다음주는 5인분, 그 다음주는 10인분을 팔았다. 월세가 10만 원인데 2만5000원을 벌었다.

11월17일 저녁 서울 강남 스파크플러스에서 열린 제17회 성실캠프에서 강연 중인 안태양 푸드컬처디렉터(촬영: 안상욱)

지금 안태양 씨는 짐짓 화려해보인다. 필리핀에서 떡볶이 노점으로 장사를 시작해 월 매출을 1억 원까지 키우고 가게를 중국계 대기업에 매각한 뒤 요식업 전문가로 활약한다. 조스떡볶이를 비롯한 대형 프랜차이즈가 안씨에게 도움을 구한다. 지금은 필리핀 대형 쇼핑몰 푸드코트 디자인 총괄을 맡아 연말까지 필리핀과 한국을 오간다. 


하지만 안씨도 처음에는 사업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순진한 대학생이었다. ‘대박’을 좇던 무모한 대학생에서 엄연한 사업가로 거듭난 안태양 씨의 성장기를 들었다. 11월17일 저녁 서울 강남 스파크 플러스에서 열린 제17회 성실캠프 무대였다.


공부

떡볶이 장사를 시작한 안태양 씨는 4개월차에도 15~20인분 밖에 팔지 못했다. 떡볶이는 맛있었다. 맛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때 중요한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장사를 어디서 배웠나?” 안씨 주변에는 외식업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친척이나 동네 친구, 지인 중에도 없었다. 묻고 물으며 깨달은 답은 이거였다. “TV에서 배웠다.”


“TV에서 보면 음식이 맛있으면 손님 줄 세우고, 건물 세우잖아요. 저는 이것만 알고 있었어요. 정작 외식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외식업을 했다는 사실에 소름 끼쳤죠.”
안씨 노점 첫달 모습 (안태양 대표 페이스북 인용)

안씨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장사 관련 책 50권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생계를 꾸리려 과외를 다니고, 대박을 좇으며 야시장에 나가는 시간만 빼고 책을 읽었다. 이 때부터 장사가 무엇인지, 서비스 정신이 무엇인지 공부했다. 책이 좋으면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저자 강연과 기사도 찾아 탐닉했다.


공부한 뒤에야 깨달았다. 떡볶이 노점은 장사가 될래야 될 수가 없는 상태였다. 호객에 나선 안태양 씨는 얼굴에 힘든 티가 역력했다. 간판도 없이 노란 종이에 ‘떡볶이 100페소’라고 써 붙여뒀다. 조명도 싸고 오래간다는 이유로 떡볶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구를 달아뒀다. 소개 멘트도 장황했다. 주변 상인도 안씨 자매를 고깝게 봤다. 


책으로 공부한 내용을 모두 장사에 반영했다. 모두 바꿨다. 매일 아침 30분 씩 웃는 연습을 했다. 얼굴에 웃음이 각인돼 체력이 바닥나도 마음이 지쳐도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연습했다. 디자이너에게 부탁해 간판과 메뉴판을 만들고 전구도 바꿨다. 소개 멘트도 고객이 듣고 싶은 언어로 간명하게 다듬었다. 야시장 상인에게 인사 다녔다. 떡볶이를 포장해 나눠줬다. 음료수도 돌렸다. 인근 상인이 단골 손님에게 안씨 떡볶이 노점에도 가보라고 권할 정도로 마음을 열었다.


장사 6개월차에 안씨는 떡볶이를 팔다 동생과 부둥켜 안고 울었다. 떡볶이를 아무리 퍼도 손님이 줄지 않았다. 손이 안 올라가 더 이상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매일 노점을 열어도 고객이 적어도 200명은 왔다. '이제 됐다’라고 생각했다.


30%

물리적인 한계에 닿았다. 두 자매가 떡볶이를 아무리 빨리 팔아도 팔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두 번째 매장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하루 200그릇을 팔았는데 월말이 되면 남는 돈이 없었다.


그제야 영수증을 꺼내 봤다. 떡볶이에 들어가는 떡 한 개가 200원이었다. 한국 슈퍼마켓에서 소매가로 사왔기 때문이다. 1인분 한 그릇에 떡 10개가 들어가면 2000원이다. 여기에 어묵과 고춧가루도 들어간다. 원가를 따져보니 2500원에 파는 떡볶이 한 그릇의 원가가 2500원을 넘었다. 반년 동안 장사가 아니라 자원봉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슈퍼마켓에 가 도매상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거절당했다. 하릴 없이 도매상 앞에 서 기다렸다. 모든 납품 트럭 연락처를 적어서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다들 코웃음만 쳤다. 떡볶이 떡 1박스를 팔겠다는 도매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매상 위치를 물어 직접 찾아갔다. 야시장에 나가지 않는 날은 도매상에 가서 살았다. 모든 직원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지금은 1박스만 팔지만 곧 놀랄 만큼 많이 팔겠다"라며 직접 거래를 터달라고 말하고 다녔다. “지금 도와주시면 나중에 대박나도 사장님한테만 떡을 받겠다”라는 터무니 없는 약속도 거듭했다. 결국 도매상 사장은 안씨의 끈질김에 마음을 돌렸다. 납품하기에는 수량이 너무 적으니 지나가는 길목에 놓고만 가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도매로 떡을 받아 단가를 50원으로 낮췄다.


떡은 시작이었다. 소금, 설탕, 야채, 고춧가루 모든 재료를 다 도매로 받으러 정보를 수집하고 발품을 팔았다. 노력 끝에 재료값을 음식 값의 30%에 맞췄다. 이때 교훈을 안씨는 깊이 새겼다. 그 뒤로 "아무리 대형 프로젝트라도 원가가 음식 값 30%를 넘으면 손대지 않는다”라고 안씨는 못박았다.


매뉴얼

2호점을 열었다. 또 문제가 나타났다. 음식 맛이 달랐다. 필리핀 직원은 안씨 자매처럼 눈대중으로도 일정하게 요리할 만큼 한국 음식을 경험해 보지 못한 탓이었다. 외식업에 매뉴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만들어도 일정한 맛이 나오도록 규격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요리를 담당하던 동생에게 대뜸 100인분을 1인분씩 나눠달라고 했다. 동생 찬양씨는 화 냈다. 안씨는 100인분에 고춧가루 1㎏이 들어간다고 해서 1인분에는 100분의1인 10g만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며 동생을 닦달했다. 아니었다. 단순히 등분하면 맛이 달랐다. 모든 레시피를 바꿨다. 불고기 소스와 잡채 소스, 야채도 1인분씩 포장했다. 요리하는 시간도 타이머를 설정하고 불 세기를 맞춰 매뉴얼 1장만 있으면 누구나 똑같이 요리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적었다.


음식 맛이 같아진 뒤에야 2호점에도 손님이 찾아왔다. 2~3개월 뒤에는 두 매장 매출이 같을 정도로 성장했다.

서울시스터즈 노점 매장 (안태양 대표 페이스북 인용)

브랜드

자신감이 붙었다. 3호점을 열었다. 고객 응대, 종업원 옷차림, 음식 맛까지 철저하게 매뉴얼로 정리해 공유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매출이 안 나왔다. 가게 목이 나쁜가 싶어 자리도 옮겼다. 소용 없었다.


이유를 고민하다 알았다. 3호점에 없던 유일한 요소는 바로 안씨 자매였다. 뒤집어 말하면 고객은 떡볶이를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안씨 자매를 만나러 오는 셈이었다. 떡볶이와 한국 음식, K팝을 쉴새 없이 떠들어대는 안태양 씨와 손목으로 프라이팬을 쳐대는 동생 찬양씨를 보러 왔다 떡볶이도 사 먹고 간 것이다. 책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다. '장사와 사업은 다르다. 장사는 주인이 있어야 돌아간다. 사업은 주인이 없어도 된다.’ 안씨는 자매가 자리를 비우면 매출이 곤두박질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도 한국에서 브랜드, 마케팅, 기획 책을 50권 받아 공부했다.


이때까지도 가게 이름이 없었다. 그냥 한국 여자애들이 떡볶이 파는 곳이었다. 이름을 지어야 했다. 첫 이름은 ‘핫시즈'였다. 매운(hot) 떡볶이와 조미료(seasoning) 혹은 자매(sister)을 합한 말이었다. 나름 재치있다고 만든 간판을 내건 뒤, 옛말에 틀린 말 없다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떡볶이 사는 고객보다 전화번호 물어보러 가게에 들어오는 남성이 더 많았다. 핫시즈는 섹시한 자매라고도 읽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쳤다. 첫 간판은 하루 만에 버렸다.


좀더 본질에 닿은 이름을 고민했다. 브랜드 책에서 정체성(identity)과 콘셉트를 고민하라는 말이 나왔다. 안씨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돌아봤다. 원가가 500원인 떡볶이가 필리핀에서 제일 맛있을 리는 없었다. 매장이 야시장에 있어 시끄럽고 불편하다. 이런 단점 역시 안씨 가게의 정체성이었다. 안씨는 “원래 한국에서도 떡볶이는 거리에서 먹는다”라며 “우리 떡볶이를 먹으면 작은 서울을 경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침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 한국 드라마에서 포장마차가 나와 필리핀 시청자도 한국식 노점 문화를 알아가던 터였다.


서울이라는 고객 경험, 자매가 운영한다는 정체성을 합해 ‘서울시스터즈'라는 이름을 지었다.  안씨 자매가 매장에 상주할 수는 없으니  디자이너를 고용해 로고를 만들었다. 모든 종업원이 로고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빨간 두건을 썼다. 현수막을 내걸었다. 포장 상자에 스티커로 로고를 붙였다. 3호점 매출이 평균치로 따라오자 7호점까지 사세를 공격적으로 확장했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 마케팅을 시작했다. 한국 연예인이 떡볶이 먹는 사진을 공유하며 고객과 관계를 다졌다.

서울시스터즈 로고 (안태양 대표 페이스북 인용)


브랜딩 작업 후 K팝 이벤트에 참가한 서울시스터즈 매장. 많이 정돈됐다 (안태양 대표 페이스북 인용)


포장 판매

매장을 8호점까지 열었다. 하지만 월 매출 1억 원은 매장에서 2500원짜리 떡볶이를 팔아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수치다.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매출을 끌어올리는 비결 역시 고객한테 나왔다.


한 교수가 매주 토요일마다 떡볶이를 사러 왔다. 매주 10인분을 사갔다. 떡볶이를 그렇게 좋아하나 싶어 물어봤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가 떡볶이를 좋아하는데, 휠체어를 탄 채 야시장에 오기 힘들어 자신이 매주 10인분씩 포장해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1인분은 아침에 바로 먹지만 9인분은 냉동실에 보관했다 전자렌지에 돌려 먹는다고 했다. 가슴이 아렸다. 아버지는 떡볶이다운 떡볶이는 고작 하루 먹고 나머지는 떡볶이죽으로 먹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위해 떡, 어묵, 소스를 나눠 포장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여력이 없던 안태양 씨는 거절했다. 하지만 매주 찾아와 10인분을 포장해가는 그의 부탁을 매번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포장용 제품을 만드는 직원을 새로 뽑았다. 집에서 물만 넣고 끓이도록 떡볶이 재료를 나눠 담고 조리법을 적어 포장용 제품을 만들었다. 기왕 직원을 채용했으니 100개를 만들었다. 놀랍게도 금방 매진됐다.


포장 판매는 서울시스터즈 떡볶이 집에 폭발적인 성장세를 가져왔다. 매장 수에 정비례하던 매출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포장 담당 직원은 누구보다 바빠졌다. 도매로 받는 떡볶이가 200상자에 달했다.


주말 바베큐 파티에 쓸 음식을 팔아달라는 고객도 나타났다. 불고기, 제육볶음, 잡채도 팔았다. 페이스북으로 미리 주문을 받고 선불로 결제한 뒤 운전기사를 보내 음식을 받아가는 고객이 수십 명에 달했다. 토요일 아침 서울시스터즈 매장 앞에 차 수십 대가 서 있는 풍경은 일상이 됐다.

동생 안찬양씨와 필리핀 영화배우 (안태양 대표 페이스북 인용)


사업 매각

가게가 유명해지니 연예인도 부지기수로 다녀갔다. 언론에서도 주목받았다. 인터뷰도 많이 했다. 안태양 씨는 동생과 함께 서울시스터즈로서 4년 동안 필리핀에서 청년 창업가로 입지를 다졌다.


때 마침 하이네켄, 칭따오 등 걸출한 브랜드를 유통하는 중국계 대기업 GNP상사가 안씨를 채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할 이를 찾는데 필리핀에서 자수성가한 안씨가 적임자로 보인다는 얘기였다. 더 큰 경험을 해보고 싶던 안씨는 서울시스터즈는 매각하지만 브랜드는 계속 보유하고 동생과 함께 합류한다는 조건으로 사업을 정리하고 GNP상사에 들어갔다.


그 뒤로 필리핀에 직원만 400명에 달하는 대형 고기집을 세우고, 한국에 치킨 브랜드를 만드는 등 다양한 일을 했다. 


푸드컬처디렉터

안태양 씨는 스스로를 푸드컬처디렉터(food culture director)라고 부른다. 외식업을 종합예술로 디렉팅하는 일은 하고 싶다는 뜻을 담았다.


"음식만큼 그 나라 문화를 잘 알려주는 매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파리 루브르 미술관를 관람한 것보다 노천 카페에서 커피 마신 기억이 세포 하나하나에 저장됐습니다. 맛있는 음식은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음식과 문화가 맞닿았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면 필리핀으로 대책 없이 떠난지 어느덧 10년째다 된다는 안씨. 2500원짜리 떡볶이를 2500원 들여 만들어 팔던 한 대학생은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어엿한 사업가이자 외식업 전문가로 거듭났다. 10년차에는 쉼표를 찍고 동생과 식문화가 발전한 유럽 등지를 방문해 충전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의 눈은 다음으로 열정을 불사를 일을 찾고 있었다. 무일푼 한국 청년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겨룰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준 그의 도전을 응원한다.<끝>


이 글은 <나는 1인 기업가다> 매거진 11월호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나는 1인 기업가다> 매거진은 이곳에서 무료로 내려받아 볼 수 있습니다. PDF 파일입니다. 과월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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