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어글리 딜리셔스>
넷플릭스의 <어글리 딜리셔스>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음식을 통해 다양성을 반추해 보는 시간에 가깝다. 포맷 자체는 이전에 데이빗 장이 호스팅 했던 쇼 <셰프의 마인드>와 비슷하나, 이번에는 음식 자체에 대해 탐구하기 보다는 음식을 주제로 여러가지 논쟁을 벌인다. 어째서 서양 요리는 고급이고 동양 요리는 정크 푸드 취급을 받는지, 음식의 ‘정통성'이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등을 주제로 여러 문화와 민족에 관해 이야기 한다.
나는 미국 밖에 사는 한국인이지만, 세계의 모든 것이 미국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이상 미국의 여러가지 움직임을 주시할 수 밖에 없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정치, 경제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미국인들의 세계 인식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은 미국인들에게 아주 크고 급작스런 자괴감을 안겨준 듯 했다. 갑자기 모든 쇼에서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윤리가 위기에 처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일부 블랙코메디에서나 밈으로 쓰이던 내용을 이제는 모두가 진지하게 성찰하며 지켜져야 할 가치로 소중히 다룬다. 단지 대통령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더 옳은 방향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데이빗 장은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음식의 다양성과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이들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것이 미식계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이야기 한다. 무엇이 더 우월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며 음식과 사람 모두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지닌다고 설파한다.
남성인 데이빗 장 입장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인 것은 맞지만,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에서 여성 셰프 테마가 빠진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다양한 여성 셰프들이 출연하기는 하나 그들이 주방에서 겪어온 일들은 결코 남성 셰프들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들어 미식계에서 여성 셰프들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 또한, 그 동안 업계가 남성 셰프 위주로 구성 돼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밥(Homecook) 에피소드는 가장 문제점이 많은 회차기도 하다. 뇌종양 수술 이틀 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아들에게 김치찌개를 끓여 주었다는 데이빗 장 어머니의 일화는, 모든 한국 여자들이 절대 웃으며 편히 들을 수 없을 이야기다.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이기 보다는 자기 몸이 걸린 상황에서도 자신을 우선시 하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완벽히 제거 당한, 전통적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전형적 여성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집밥 에피소드에서는 남성 셰프들이 ‘할머니’의 맛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음식은 어머니나 할머니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그렇게 이해 해야 하는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은 어차피 집안일을 하지 않던 시절이니까? 데이빗 장의 쇼가 그 시절에 만들어졌다면 맞는 말이지만 과거의 현상에 대해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넘어가는 것은 현대의 리얼리티 쇼로서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무런 가치를 책정 받지 못했던 여성의 가내 노동을 ‘사랑’과 ‘집밥’이라는 판타지를 덧씌워 미화한다. 그런 다음 남성인 자신들은 그것을 사회에서 가치를 더해 재생산 하여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무한한 자비’가 아니라 공짜로 노동력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희생’이라는 점을 되돌아 보지 못한다.
아예 이런 가치판단 자체에 대해 무관심하게 음식 이야기만 하는 쇼였다면 당연히 필요 없을 내용이다. 하지만 아시아인인 데이빗 장이 남부의 뿌리깊은 흑인 차별에 대해서까지 탐구 하면서도 요식계의 남녀차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넘어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이유다. 아무리 모두가 다양성이 중요한 가치라는 점에 이견에 없다 하더라도, 모든 인간 사이에는 시차적 관점이 존재한다. 아시안-아메리칸 남성들이 인종 차별에는 민감하지만 성차별에는 무지한 것처럼 말이다. 이 시차적 관점은 성별, 인종,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간들이 한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상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 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