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N년 전 쓴 홍콩 여행기)
구룡성채를 처음 본 것은 한 블로거의 여행 후기에서였다. 사실 ‘구룡성채’를 본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모두 허물어진 건물 터 위에 지어진 ‘구룡성채 공원’을 봤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잘 조경된 공원은 아늑하고 예뻤다. 날렵한 검은색 기와를 얹은 청나라 양식의 건물들과 열대 기후 특유의 무성한 나무가 잘 어우러져 정돈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공원 입구에 있는 옛 구룡성채의 모습을 축적으로 재현한 디오라마였다.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고층건물의 모습을 재연한 네모난 작은 기둥들이 한치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디오라마의 모습은 이질적이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구룡성채’를 구글링하자 생전 처음 보는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룡성채의 모습을 숫자로 묘사하자면 이렇다. 0.03㎢의 구역 안에 5만 명이 모여 살았고, 2차 대전 이후 계속 안으로, 위로, 불법증축을 하며 건물과 사람의 밀도가 점차 높아지다 1994년 당국에 의해 철거 되었다.내부 주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림과 문장으로 묘사하자면 아래와 같다. 고층 건물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기 때문에 건물 안에는 빛도 바람도 들지 않았다. 치외법권 구역인 탓에 구룡성채 거주 주민들 중에는 출생신고나 주민 등록 등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고 마약이나 삼합회의 검은 돈 거래가 일상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은 점점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해 갔다. 구룡성채 내부에는 학교, 병원, 부동산 등 여느 주거지역이나 상권에 있는 인프라들이 주민들의 손에 의해 생겨났다. 물론 모두 무면허, 무허가였다. 성채 안쪽에 살던 주민들은, 엘레베이터도 없이 수많은 계단을 내려가 바깥까지 나가 쓰레기를 처리하고 올 엄두가 나지 않을 땐 성채 가운데 자그마하게 남아있던 청나라 양식 기와 건물 위로 쓰레기들을 던지곤 했다. 옥상에는 자신들의 정원과 놀이 공간을 가꾸었다. 화분이나 토끼, 새 등의 동물을 키웠다. 지금은 없어진 카이탁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이 구룡성채의 옥상을 스치듯 낮게 날아다녔다. 중경삼림의 첫 번째 이야기 속 승무원이 탄 비행기가 착륙할때 뒤로 보이는 전경이 구룡성채다.
그 모습들에 그토록 끌린 이유는 뭐였을까? 어쩌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두운 세계에 대한 안일한 호기심이었을까? 지금도 그곳에 집착한 이유를 한 가지로 설명하진 못한다. 어쨌든 일상 속에서 마주쳤다면 일말의 죄책감까지 느껴 고개를 돌렸을 풍경이었지만 ‘이미 없어진 곳’이었기에 나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끈질기게 구룡성채에 대한 자료를 뒤진 결과, 철거되기 전 성채 내부에서 촬영한 독일 다큐멘터리의 유튜브 링크, 그리고 각기 다른 사람들이 그린 내부 단면도 여러 장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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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을 거의 10년 정도 간격을 두고 두번째로 읽었을 때, 첫 번째로 이 책을 읽고 받았던 감동과는 다른 낯선 감정이 들었다. 모모의 인생에서 “감동”을 받는다면 그건 아마 로자 아줌마를 비롯해 주변의 모두를, 자신의 마음을 집어 삼키려고 하는 고통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해 나가는 꿋꿋함 때문일텐데, 왜 나는 10년 새에 그 감동보다 그런 감동을 느꼈던 예전의 나 자신에게 품은 회의감을 더 크게 느끼게 됐을까? 이 괴리감을 찬찬히 살펴보던 나는, 이 감정이 구룡성채의 영상과 기록을 찾아보다 그런 나 자신에게 불현듯 환멸을 느꼈을 때의 감정과 비슷하단 걸 깨달았다. 구룡성채는 94년 철거되었고 이 곳 주민들의 거주권에 대한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기록돼 있지 않았다. 실제로 그 사건과 역사 안에 존재했던 사람들을 조명하고 그들의 삶에 공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채, 도시의 빈부격차 속 빈민의 생활상으로만 기억할 수 있는 관조자의 입장에서 픽션을 읽고 심정적으로 '공명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이 대답에 대해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많은 고통을 실제로 지나와 보고, 또한 목격한 세월을 적립해 온 나는 이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역경”이나 “아름다움” 같은 정의를 내리지 못하게 됐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 때까지 읽어온 로맹 가리의 책들에서 느꼈던 자뭇 위악적인 시니컬함 없이 처절하게 비참함을 묘사하고 있어 그 부분에서도 더 큰 감정적 물결을 느꼈던 것 같다. 타인의 불행을 나의 교재로 삼기에는 지금의 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높아졌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걸까? 어쩌면 비참함이란 사랑과 같이 언제나 인생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나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가 당사자성이 있는 테제란 걸 매일 되새기며 살아가는 어른의 삶에 발을 디딘 채로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소재로 한 픽션에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큰 감동을 느끼긴 이젠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